완벽한 복수

처절하게 공감하다

by Pearl K

마지막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학부모님들이 시험감독을 위해 학교를 방문하셨다. 언제나 그렇듯 대기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시험감독 들어가기 전까지 10분 정도의 휴식 시간이 있었다.


그때 학부모님 중에 한 분이 내게 다가오셔서 사서 샘이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했더니 반가워하시며 꾸벅 인사를 하셨다.


“저 지윤이 엄마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지윤이는 잘 지내죠?”


지윤이 어머니는 선생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하셨다. 나는 아니라고, 제가 한 일이 없다고, 스스로 잘 이겨낸 거라고 거듭 말씀드렸다. 정말 그랬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월요일이었다. 분주하게 일을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2학년 6반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내용은 스포츠 시간에 수업 듣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학생이 있다는 거였다. 선생님은 매주 그 시간에 아이에게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라고 해도 되는지 물어보셨고, 나는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점심시간을 마치는 예비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5교시 시작종이 울리고 5분쯤 지나자 아이가 도서실로 들어왔다.

“어, 네가 지윤이니? 담임선생님께 들었어. 편한 곳에 앉아서 읽고 싶은 책 읽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수업 끝나는 종소리에 아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교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한 학기 내내 매주 두 번씩 스포츠 시간마다 아이는 도서관에서 지냈다. 담임 선생님께 슬쩍 전해 들었는데 1학년 때 아이를 괴롭혔던 다른 아이들 몇 명이 있다고 하셨다.


학년이 바뀌면서 다른 반이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공교롭게 스포츠 시간에는 세 반이 함께 수업을 들어야 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을 스포츠 시간에 다시 마주쳐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거다. 대략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아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많이 어렵고 힘들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1학기가 얼마 안 남았을 무렵, 잡지 서가를 정리하다가 지윤이가 혼잣말로 "진짜 죽여버리고 싶어. 너무.."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됐다. 섣불리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아픔의 깊이와 상처를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계속 고민했다. 담임선생님께 들은 얘기와 아이의 표정, 가슴 깊이에서 내뱉던 증오 가득한 말들.


학기 말이 얼마 안 남았을 무렵 스포츠 시간에 내려온 아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지윤아, 샘이랑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

"네."


“지난번에 지윤이가 말한 거 샘도 들었어. 욕했다고 혼내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누가 그렇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

“.... 있어요.”


“.. 샘이 비밀 얘기 하나 해줄까? 이런 얘기 학생한텐 첨 하는데, 꼭 비밀로 해줘야 해. 약속!”

“네.”


“샘도 너처럼 학교 다닐 때 엄청 힘든 일 있었거든.”

“.... 진짜요?”


“응. 너무 힘들어서 졸업한 후에도 되게 오래 힘들었어. 근데 그거 알아?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해도 걔들은 절대 몰라.”

“... 하아”


“나만 힘들고 괴롭고 죽을 것 같지. 걔들은 전혀 모를걸? 너무 억울하잖아. 걔네를 죽이면 니 기분이 나아질까? 그렇지 않아. 걔네를 죽이면 너만 살인자가 되는 거잖아.”

“.. 억울해요.”


“가장 좋은 복수는 뭐냐면, 네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거야. 지금 걔네를 죽이면, 널 괴롭힌 애들이랑 똑같아질 뿐이야. 네가 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완벽한 복수야. 내가 니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그걸 보여주는 거지.


지윤이는 조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엉엉 울었다. 휴지를 건네주고, 마음껏 울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동안 들리던 울음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렇게 1학기가 끝났다. 2학기부터는 스포츠 시간이 바뀌었는지, 아이는 수업 시간에 더 이상 도서관에 오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지윤이가 내가 해 준 비밀 이야기를 듣고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사사건건 화를 내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늘 언니랑 싸우던 모습이 사라졌다. 게임도 스스로 거의 끊었고 더 멋진 사람,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고 다짐했단다. 기특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결국 자신만 힘들게 하던 날카로운 가시들을 접고, 스스로를 위한 진짜 좋은 길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두 가지를 더 당부드렸다. 앞으로도 아이가 다시 힘들어할 수 있다고. 항상 지윤이에게 사랑을 많이 표현해 주시라고. '엄마는 널 사랑해', '넌 너무 소중하고 멋진 내 딸이야'하고 격려해 주시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몇 번 더 고맙단 말과 함께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내가 지윤이에게 준 건 충고가 아니었다.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처절한 공감이었다. 사소하게 지나칠 수도 있었던 말로, 용기를 내어 자신을 어둠에서 끌어낸 지윤이는 진짜 제대로 멋있는 소녀다.


많은 아이들을 학교에서 만난다. '이 아이를 만나라고, 나를 이 학교로 보내셨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의 약함이 아이들에게 강함의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