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오빠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학교 신입생 때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침내 정착하게 된 선교 동아리, 그곳에서 찬이 오빠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였지만, 언제나 후배들을 친구처럼 격의 없이 대해 주었다. 덕분에 선배라는 부담감 없이 오빠와는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꼬박 2년의 짧지만 길었던 시간을 함께 했다.
그다음 해, 찬이 오빠는 전교에서 1명 만을 선발해서 중국에 1년간 보내주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뽑혔고 그렇게 1년간 우리를 잠시 떠났다. 물리적인 거리는 멀어졌지만 중간중간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고, 겨울방학이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빠가 교환학생을 잘 마치고 돌아온 것을 다 같이 모여 성대하게 환영해 주었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새 학기가 되었을 때, 캠퍼스에서 찬이 오빠를 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오빠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에 몸이 좋지 않아 건강검진을 했는데 백혈병 비슷한 질환이 찬이 오빠에게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병명은 골수이형성 증후군이었다. 백혈병 전 단계라고도 불리는 이 질환의 치료법은 시의 적절한 골수이식뿐이다. 그렇게 내가 4학년을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골수기증자를 기다리며 오빠의 건강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2003년 그 해 여름, 오빠가 드디어 골수기증 대상자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두 기뻐했고 수술이 잘 되기만을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머지않아 안타깝게도 기증 직전에 기증자가 기증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오빠의 기회는 또 미루어졌고 두 달 후 다시 골수이식을 받았지만 이미 회복 가능한 시기를 놓쳐버렸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서울에 막 올라와 작은 데이터베이스 회사를 다니던 중이었다.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중이던 찬이 오빠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빠가 속상하지 않도록 절대로 울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병실을 찾았다.
1년이 넘는 투병기간 동안 안 그래도 핼쑥했던 몸이 깡말라 있었다. TV에서만 보던 아프리카의 기아 같았다. 거기에 황달로 온 몸의 피부가 누렇게 떠 있었다. 마른 몸이 퉁퉁 부어 눌린 피부가 제자리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차마 오빠의 모습을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온몸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찬이 오빠의 두 눈만은 초롱초롱했다. 하나뿐인 누나가 십자수로 손수 만들어주었다는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찬이 오빠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며칠 후, 대법원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 마감이 있던 날이었다. 3일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야근에 특근에 초근까지 하며 지쳐있다가 끼니를 위해 겨우 한 술을 뜨는 중이었다. 휴대폰이 울렸고 "찬이가 떠났대." 하는 효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선득했던 마음은 그날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오빠를 보내고 난 후,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때의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찬이 오빠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빠가 얼마나 다정하고 착했는지, 가끔 예상치 못한 엉뚱한 행동으로 우리를 웃겼는지, 마지막에 만난 오빠의 얼굴이 얼마나 빛났는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각자 직장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바쁘게 사는 동안 20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자주 만날 수 없는 만큼 찬이 오빠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기회가 줄어들었다. 최근 오선화 작가님의 글을 계기로 정말 오랜만에 찬이 오빠를 다시 떠올리고 생각할 수 있었다.
삶 속에서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그 이후로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는 듯하다. 기억에 남겨진 소중한 사람이 있으니 남겨진 자들의 몫을 다해낼 수 있도록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살피며 더 열심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찬이 오빠의 싱그럽던 미소를 떠올리며 남은 한 달도 더 힘을 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