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사진첩

rainy day

by Pearl K
비 오는 날이 좋았다. 그런 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았다. 빗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넉넉히 가려주었다.


비가 오는 소리는 마치 음악 같아서 메말라 갈라진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똑. 똑. 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맞추어 빗방울의 비트와 리듬이 들리는 듯했다. 쏴아 하는 빗줄기 소리는 격한 박수소리 같았다.

비가 오면 자주 떠올리게 되는 영화가 있다.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제목의 오래된 고전영화다.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가 빗속에서 경쾌하게 두 구두를 따다닥 하고 허공에서 마주치며 춤을 추는 장면으로도 아주 유명하다. 원래부터 비를 좋아했는지 아니면 그 영화를 본 다음부터 비가 좋아진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비가 오는 날의 느낌은, 항상 뭔가 더 나를 생동감 있고 살아있게 하는 느낌이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은 식물들이 파릇하게 살아난다 비가 온 후 길이 깨끗해지면서 꽃들이 환하게 피어나는 모습이 더 생생히 보여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비가 오면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면 맨몸으로 나가 흠뻑 젖도록 비를 맞으며, 거리가 마치 무대라도 된 듯 빗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싶었다.


아직 열세 살이 되기도 전의 어느 날이었다. 하루 종일 엄청난 비가 쏟아진 날이 있었다.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도로마다 물이 빠지기는커녕 하수도까지 다 역류해 버렸다. 그렇게 불어난 물은 집과 집 앞 마트 사이의 도로를 가득 채웠고, 인도까지 침범할 듯이 일렁였다.


또래 아이들은 집집마다 밖으로 나가 물속을 첨벙거리며, 도로 위에 갑자기 생긴 수영장을 만끽했다. 나도 그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물이 지저분하다며 엄마는 내보내 주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창밖으로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면서 아쉬워만 했었다. 그때의 아쉬움을 꼭 보상받고 싶었다.


꼭 한 번은 영화처럼 온몸이 흠뻑 젖도록 비를 맞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기회는 내 기대보다 빨리 찾아왔다. 여름이었고, 금요일 밤이었다. 친구와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준비도 없이 비를 흠뻑 맞았고, 급한 대로 가까운 LP Bar로 몸을 피했다.


그즈음 음악을 들으러 친구들과 자주 가던 곳이었다. 비 맞은 몸은 실내로 들어가니 으슬으슬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장님은 추워하는 우리를 위해 터를 틀어주시려고 했지만, 확인해 보시더니 히터가 고장 난 걸 안 고쳐놓으셨다고 했다. LP Bar의 사장님은 임시방편으로 휴대용 가스버너를 가져오셨다. 이걸로라도 불을 쬐어 몸을 덥히라며 가스버너에 불을 켜주셨다.



비를 흠뻑 맞아 마음도 몸도 촉촉 아니 축축해진 우리는 오들오들 떨며 휴대용 가스버너의 자그만 불꽃을 쬐었다. 사장님은 분위기 있는 LP 음악을 끊임없이 선곡해 주셨다. 우리는 조명도 나가버린 LP Bar안에서 자그마한 촛불 하나와 가스버너 불꽃에 의지하며 아침을 기다렸다.


밖에는 계속 세찬 비가 쏟아졌고, 우린 가스 불꽃에 의지해 몸을 녹이며 박혜경의 'rain'을 들었다.


"늘 함께했던/카페에 앉아/누군가를 기다리듯이/혼자서 차를 마시고/널 바라보던/그 자리에서/물끄러미 창밖을 보다/비 내리는 거릴 나섰지/차가운 빗속을/바쁜 듯 움직이는/사람들 속에 어느새/뜨거운 내 눈물이/내 뺨 위로 흐르는/빗물에 눈물 감추며/한참 동안 이렇게/온몸을 흠뻑 적신채/저 퍼붓는 빗속을/하염없이 울며 서있어/쏟아지는 빗속에/끝없이 눈물 흘리며/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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