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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Dec 21. 2022

굴레를 벗어나

생각의 틀이란 가치관과 비슷한 느낌의 말인 것 같다. 나의 생각의 틀은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한 흑과 백, 옳음과 그름, 맞는 것과 틀린 것 같은 가치들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혼란스러운 것들이 선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명확해 보이는 기준들 때문에 우리는 기준 뒤에 가려진 사람을 보지 못하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그 어떤 기준이라도 사람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자주 까먹게 된다.


   며칠 전에 적었던 나의 편협했던 시절이 확장되었다는 이야기와도 유사한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배우고 자라온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옳고 그름은 매우 분명했고, 나는 그 기준에 따라 나의 행동을 맞추는 동시에 타인의 어떠함에 대해 쉽게 단정 짓고 정죄하는 마음을 품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나 역시 죄가 가득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예수님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데려와 돌로 쳐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 풍습으로 간통은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범죄였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였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셨다. “너도 똑같다”라고 썼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가 하나같이 끔찍한 죄인이다. 죄인이 같은 죄인에게 ‘너는 벌 받을만하다. 너는 끔찍한 죄인이다’하고 정죄할 권리는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지은 죄로 인해 심판받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뿐인 희망이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나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하여 용서해주고, 죄인이 아닌 의인처럼 여겨지는 은혜를 얻게 된다는 거다.


   그래서일까 기독교인들은 때로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쉽게 정죄한다. 내가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예수님 덕분에 의인처럼 봐주시는 건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또 죄를 짓는다. 그렇게 매일 짓는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타인의 죄를 지적하느라 바쁘다. 이 나라의 기독교가 변질되고 현재 자꾸만 그 빛을 잃어가는 가장 큰 이유다.


   지나온 시간 동안 다시 하고 싶지는 않은 여러 힘든 경험들을 통해서 내가 버린 것은 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적 가치관은 더욱 풍성해지고 공고해졌다. 대신 나 역시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마음이 추가되었다. 한 사람을 하나님의 시선처럼 안타깝고 사랑해야 할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배웠을 뿐이다.


   분명히 우리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진리와 가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 있지만 대신 자격 없는 내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보내시고, 나를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갇혀 있던 나를 정말 많이 자유롭게 해 주었다. 누구 하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또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 하나 즐거워서 죄를 짓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자격 없는 내가 받은 사랑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흘려보내는 것. 나를 기다려 주신 것처럼 한 사람을 참아주고 품어주고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가진 가장 곤고하고 튼튼한 생각의 틀이 되었다. 앞으로도 그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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