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마음에 품게 된 작은 소망 하나가 있었다.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게 되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후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후 첫 급여를 받았는데, 88만 원 세대라고 불리던 것답게 첫 급여는 채 88만 원이 안 되었다.
살고 있는 방의 월세를 내고 세금을 제하는 것만으로 급여의 절반이 날아갔고, 빠듯한 생활에 컴패션의 아동 1인당 후원 금액인 월 45,000원은 매우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하기로 했다. 대학생 때 선교단체에서 만나 간사님으로 헌신한 선배에게 월 1만 원을 후원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꾸준히 직장에서 일하며 후원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고 열심히 일하다가도 원치 않게 실업 상태가 되면 후원을 중단하고는 했다.
안정적이지는 않았으나 꾸준히 일할 직장이 생기면서 후원을 다시 하고 싶었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찾아온 학자금의 빚더미를 5년 동안 갚으면서 기본적인 생활조차도 유지할 여유가 없었다. 매번 출퇴근 교통비를 걱정해야 했고, 교회 청년부 모임에서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하는데 저녁 한 끼를 먹을 돈이 없어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집에 간 것도 여러 날이었다. 허덕이며 살았던 시기가 끝나고 마침내 학자금을 모두 갚던 날, 무겁던 어깨가 가벼워질 만큼 큰 짐을 내려놓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 월급을 받았는데 나가야 할 돈이 모두 나가고 나서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하고도 처음으로 10만 원이라는 돈이 남았다. 이 금액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첫 달에는 부모님께 용돈으로 보내드렸다. 두 번째 달에는 큰맘 먹고 낡은 옷들을 대체할 새 옷을 장만했다. 그리고 석 달째에는 선교훈련을 준비하던 교회 후배에게 후원금으로 몰래 찔러주었다. 너무도 신기했던 건 같은 달 말일에 생활비가 부족해 어려워하고 있을 때, 후원금으로 나누었던 금액과 정확히 똑같은 금액의 상품권에 당첨되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도, 틈틈이 도울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돈이 넉넉할 때보다 오히려 풍성히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만났었다. 가진 것을 움켜쥐고 있기보다 베풀고 흘려보내는 사람에게 풍성하게 갚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꼭 필요한 곳에 후원해야겠다 다시 다짐했다. 그맘때 같은 청년부였다가 해외에서 선교사님으로 사역 중인 교회 오빠에게서 아이들을 후원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중국 소수민족에 속하는 아이들인데 초등학교 1학년에 이제 막 입학했지만, 나이는 여덟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다양하단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또는 거주할 곳이 없어서, 혹은 계속되는 유목 생활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던 아이들이라고. 스무 명 정도의 아이들과 스무 명 정도의 청년들이 일대일로 결연 맺었고 성인이 될 때까지 매달 20,000원씩을 지원금으로 후원하기로 했다.
나에게 맡겨진 아이는 웃는 얼굴이 참 싱그러운 열세 살 소년이었다. 오랜 유목 생활로 학교에 가본 적이 없는데 다행히도 이제는 삼촌 덕분에 한 군데에 정착할 수 있게 되어서 처음으로 입학하는 거란다. 선교사님은 우리가 보내준 후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분기별로 보고를 해주셨다. 적은 후원금이지만 그 돈으로 아이에게는 새 운동화가 생겼고, 새로운 옷이 두어 벌 생겼고, 간식을 지원받기도 했다. 2년 정도 꾸준히 아이를 후원하면서 아이가 보내준 손 편지와 사진에 감동하고, 기도할 때마다 아이를 위해 마음을 실어 축복하고 중보 했다.
아쉽게도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의 정책으로 소수민족들이 내몰리면서 선교사님도 갈 곳을 잃어버렸다. 위험한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일단 피신하신 후에, 다시 아이들을 만나러 가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무산되어 버렸다. 몇 달 후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괜찮다며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써 달라고 부탁드렸으나, 선교사님은 너무 미안하다 하시며 더 이상 아이들을 만날 수 없으니 결연을 중단하라고 하셨다.
몇 년 동안은 선교사님이 아이들을 찾았으니 다시 후원을 해달라는 연락을 해주길 바랐는데, 결국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중국 소수민족이었던 나의 양아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가끔 그 소년이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해지는 날이 있다. 별일 없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이십 대의 청년이 되었을 텐데, 유목 생활로 돌아간 후 또 다른 배움의 기회가 있었는지, 싱그러운 미소는 여전한지 많이 궁금하고 보고 싶다. 어디서든 건강하게 씩씩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다.
몇 년 전까지는 G 어린이 재단에도 2년 가까이 후원을 하고 있었는데, 난임이 길어지면서 속상한 마음이 커져 그것마저 중단하게 되었었다. 며칠 전엔 우연히 네이버 해피빈을 통해 보았던 B 재단의 소식을 보게 되었다. 학교폭력 피해자로 생을 마감한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만든 재단으로 학교폭력 피해자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도와주는 곳이다.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큰 금액은 아니지만 다시 후원을 시작해 보기로 하고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을 완료했다.
우리나라 옛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제까지 내가 경험해 온 바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오히려 ‘하늘은 남을 먼저 돕는 자를 돕는다.’가 아닐까 싶다. 내가 가진 것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이웃들과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누고 싶다. 마음에 이와 같은 소망을 다시 부어주셨으니 앞으로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꾸준히 아이들을 후원하기로 결심한다. 나눌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며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부어주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p.s: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듣게 된 제이래빗과 스윗소로우 김영우가 함께 부른 동명 제목의 노래가 마음을 두드려 글을 쓰게 되었다. 아래에 소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