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다. 애써 깨우지 않아도 출근을 위해 정해 놓은 시간이 되면 일어나고,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몸을 돌보고, 규모 있는 생활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타인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맡은 일에는 책임을 지며,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할 줄 알게 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성숙인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는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무언가를 계속 채우고 싶었다. 자신감이 낮은 것을 비싼 물건을 사는 걸로 채우고, 모자라는 자존감을 다양한 인맥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메우려 했다. 끊임없이 물건을 사고 사람들을 리스트에 채워 나가면서도 오히려 허무했다. 나의 자신감과 자존감은 그런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나날이 자신감과 자존감은 더 바닥을 쳤다.
이제 조금이나마 알 거 같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은 오히려 더욱 큰 결핍을 부른다는 걸. 때려 넣어 채우는 행위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쌓아둔 물건들과 사람들 속에서 결국 길을 잃어버렸다. 나를 규정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소유물과 위태롭게 유지했던 관계들이 무너지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텅 빈 공허뿐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끝없는 정적 속에서 홀로 버려진 나는 수많은 낮과 밤을 언제 끝날지 모를 어둠 속에서 버텼다.
모든 것을 갖고 싶었던 욕심마저 오롯이 비워내고 나서야, 산더미 같은 욕망들 속에 가려져 있던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더 갖고자 하기보다 비어 있는 대로 남겨두었어야 했다는 걸. 여백이 있어야 내게 필요한 것을 더 명확히 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배우고 있다. 어린이 동요처럼 불렀던 ‘동전 한 닢’의 가사가 얼마나 깊은 통찰력이 있는 곡이었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 차네 /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좋은 소비를 위해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사지 않는다. 월급을 받으면 언젠가 닥칠 수 있는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은다. 소중한 관계를 위해 상대와 나 사이에 적정한 거리의 여백을 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대가 없이 나눈다. 할 수 있는 한 타인에게 친절한 태도로 대한다.
내 것만 채우려고 할수록 불행해지고, 먼저 비우고 나눌수록 행복해진다는 마법의 원리를 마침내 온몸과 마음으로 익힌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를 비우고 삶의 여유로운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어른다운 어른으로 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자세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