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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Nov 05. 2023

가을 만끽

내내 분주한 나날들이 흘러가느라 길거리의 나뭇잎들이 점점 더 알록달록하게 바뀌어 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시선을 돌렸던 것뿐인데 모르는 새에 거리는 온통 가을로 가득 차 있었다. 내일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더 늦기 전에 가을 단풍을 구경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단풍을 구경할 장소를 찾아달라고 했더니 짝꿍이 기가 막힌 곳을 찾아냈다. 이 동네에서 일하고 꽤 오래 살았는데도 처음 듣는 장소라서 명칭조차 낯설었다. “경의선 숲길 말고 경의로 숲길이라니, 그런 장소가 있다고?” 그렇게 찾아간 경의로 숲길은 예상보다도 더 좋았다. 


   아픈 다리로도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거리였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온통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뿐이었다. 하다못해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로 가득 뒤덮인 길도 너무 예뻤다. 오늘 가을이 담뿍 든 장소에서 그동안 놓치고 있던 계절을 찾은 기분이었다. 


   몇 년 전 서울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한글을 이용해서 만든 디자인 중 눈에 띄는 제품이 하나 있었다. 목욕할 때 사용하는 때수건 위에 ‘다 때가 있다’라는 말이 쓰인 제품이었다. 때수건 위에 적힌 말은 내게 두 가지 의미로 읽혔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각질, 먼지 등을 말하는 ‘때(dead skin)’와 또 하나는 시기, 시간 등을 의미하는 ‘때(the time, the moment)’다. 일종의 언어유희이기도 했는데 자그마한 때수건 속에 담긴 깊은 인생철학에 나도 모르게 감탄했었다.


   모든 삶에는 각자의 때가 존재한다. 물론 애석하게도 그 타이밍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예전부터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학창 시절은 공부해야 할 때야. 이렇게 공부만 할 수 있는 시기는 지금밖에 없어.”였다. 내가 학생일 때는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후에서야 생생하게 그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 6년간 나만 때를 놓친 것 같은 상태로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쭉쭉 잘만 나가는 것 같은데, 제자리에 멈춰 있기는커녕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계속 고민하던 퇴사를 드디어 결심하면서 그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나의 때를 찾아보기로 한 거다. 멈춰 있던 곳에서 한 걸음을 내디뎠더니 다음 걸음도 나아갈 힘과 용기가 생겼다.


   오늘 경의로 숲길을 산책하며 이 계절을 누릴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꾸준히 걸으면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속도가 아니어도 괜찮다. 앞으로도 나만의 속력으로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갈 다. 결국 나의 타이밍을 바꿀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닌 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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