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20년 전쯤이었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인가 정확히 기억조차 안 나는 일이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초, 혼자서 훌쩍 부산으로 떠난 적이 있다. 갑작스러운 부산행의 이유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동호회의 지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지만, 진짜 이유는 노래로만 들었던 겨울 바다에 가 보고 싶어서가 더 컸다.
꼭 필요한 짐만 간단히 챙긴 배낭 하나를 메고 서울역에서 가장 늦은 시간에 출발하는 밤 기차를 타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당시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의 필수품이었던 CD플레이어 안에는 나름대로 조합하여 만든 컴필레이션 앨범*이 들어 있었다. 캄캄한 어둠을 가르며 기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고, 귓가에는 기차의 속력과는 대비되는 차분하고 고요한 정서가 가득 담긴 음악들이 흘렀다. 몇 시간 후면 곧 만날 겨울의 풍경들을 기대하며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행히도 부산행 기차 안에서 좀비들을 만나지도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말로만 들어본 부산역에 떨어진 시간은 새벽 5시를 막 지났을 때였다. 개찰구를 통과하여 역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아직은 어둠이 남아 있는 하늘을 향해 크게 심호흡하며 생소하고도 낯선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 그건 바로 겨울의 냄새였다. 뼛속까지 차갑고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청량한 겨울 아침의 공기 냄새.
미리 찾아둔 대로 정류장으로 가서 새벽 첫 버스를 타고 해운대에 도착했다. 언제나 뉴스에서 보던 사람으로 가득 찬 여름의 해운대와는 다르게, 겨울의 해운대는 너무도 조용하고 한산한 데다가 쓸쓸하기까지 했다. 7시 30분,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서서히 주위가 어스름하게 밝아지더니 저 멀리 수평선 끝에서 말간 얼굴을 한 태양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시간이 갈수록 온통 붉게 물들이며 해는 불덩이처럼 솟아올랐다.
태양의 불꽃쇼에 이어진 건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오는 파도의 춤이었다. 춤의 종류 중 하나인 웨이브 댄스에서 Wave는 파도, 물결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파동, 너울거림, 굽이침을 표현하는 단어다. 파도가 추는 오리지널 웨이브 댄스는 원조답게 아주 아름답고 끝장나게 섹시했다. 저 멀리서부터 너울거리며 달려오는 수많은 물결이 서로 부딪치며 만나 굽이치다 하나의 큰 파동을 이룬 파도가 되어 모래사장을 향해 몰아치는 광경은 하루 종일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두 캔 사서 하나는 손에 들고 나머지 한 개는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주변은 환하게 밝아졌으나 세찬 바닷바람 때문에 체감온도는 영하 아래였다. 따스한 캔커피를 양손으로 잡고 비비며 얼어버린 손을 녹이고, 제대로 청승을 떨어 보기로 했다. 어디선가 기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발견하고 주워와서 물 먹은 모래사장 위에 글씨를 썼다.
첫 문장은 이것부터였다. ‘드디어 겨울 바다에 왔다.’ 이어서 내가 기억하는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과 잊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었다. 한 글자를 쓰기가 무섭게 파도가 달려와 냉큼 단어들을 빼앗아 갔다. 물결이 다시 단어들을 휩쓸어 가 버리기 전에 재빨리 글씨를 써야 했다. 그러다가 손이 시리면 틈틈이 코트 주머니 속에서 아직도 따끈함을 뽐내고 있는 캔 커피로 굳어버린 손을 풀어주었다. 파도와의 단어 술래잡기를 한참이나 하고 나니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와 바다의 조합에는 컵라면만큼 잘 어울리는 메뉴가 없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면이 익는 동안 편의점의 유리창 밖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4분을 기다려 먹은 뜨끈하고 얼큰한 라면 국물이 차가워진 몸을 데웠고, 탱글탱글하고도 쫄깃한 면발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모임에 늦지 않고 참석하려면 이제 슬슬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 말고도 서울에서 두 명이 더 오고, 부산에서는 네 명이 나오기로 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약속 장소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해운대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 같이 모이기로 한 부산대 앞에 도착한 것은 11시였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도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꽤 쌀쌀했지만 날씨는 서울보다 훨씬 따뜻했다. 일찍 온 김에 부산대 안을 구경하고 나왔더니 머지않아 선근오빠와 남경언니가 도착했고 나머지 멤버들도 모두 모였다.
부산대 졸업생이기도 한 선근오빠가 자신 있게 앞장섰다. 우리는 부산대 앞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고, 아는 사람만 안다는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꼭대기의 전통찻집에도 갔다. 함께 하는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이 왔다. 나는 저녁거리로 간단한 김밥을 구입하여 기차에 탔다. 출발시간은 오후 7시 50분이었다. 부산을 떠나는 열차에서 김밥을 먹으며 오늘 만났던 사람들에게 반가웠다는 문자를 보내고 나서 기절하듯 바로 곯아떨어졌다.
오늘은 입동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는데 차 안의 온도계에 0도라고 나와서 깜짝 놀랐다. 입동은 24 절기 중 열아홉 번째 절기로 이날부터 겨울이 시작되며 양력으로 11월 7일~8일 무렵이라고 한다. 이 무렵부터 무와 배추로 김장을 하기 시작하며, 동면하는 동물들은 땅속에 굴을 파고 숨는 계절이란다. 마침 오늘이 딱 8일이다. 그래서인지 출근길에 느껴지는 아침 공기가 어제와는 또 달랐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공기였다. 예전에 해운대에서 맡았던 진한 겨울의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시간이 꽤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내게 겨울의 풍경에 대해 물으면,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그날의 겨울 바다가 떠오른다. 아직 학기를 마치려면 꼬박 두 달이 더 남았지만, 이번 겨울방학에는 시간을 내어 기억 속의 겨울 바다를 다시 만나러 가고 싶다. 그 진한 겨울의 풍경을 말이다.
*컴필레이션 앨범
-음반의 발매 형태 중 하나. 한국어로는 ‘편집 음반’이라고도 한다. 정규 앨범(스튜디오 앨범)과 대비해서, 이미 발표된 여러 음악을 위주로 트랙리스트를 편성한 앨범이다. 한 음악가의 곡으로만 편성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 음악가의 곡을 모아 편성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