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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Nov 10. 2023

그녀가 일어났다

오늘까지 정확히 277일, 그러니까 9개월 하고도 7일이 되었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숫자로 환산해 보니 그렇다. 따뜻하고 안온했던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와 낯선 세상의 공기와 처음으로 마주한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커다란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움직이고 지탱할 수 있기까지 자라는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종이다. 갓난아기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가능한 의사 표현이라곤 오로지 울음뿐이고, 혼자서 밥을 챙겨 먹을 수도 화장실을 갈 수도 없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아이의 생존은 절대적으로 부모에게 달려 있다. 부모들은 잠을 최대한으로 줄여가면서 먹이고 트림시키고 입히고 재우고 용변을 처리하고 아이가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거쳐 자라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그렇게 4주, 6주, 8주, 10주가 지나 마침내 100일에 도달하면 아이는 밤에 깨지 않고 5시간 이상 통잠을 자는 일명 ‘백일의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이 기적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나름 순한 아기여서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통잠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부모의 기록저장매체는 고정된 사진에서 액티브한 영상으로 점차 넘어가게 된다.


   사진으로만 볼 때도 너무 귀여웠는데, 영상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기쁨을 준다. 그건 양가의 부모님은 물론 첫 조카를 만난 삼촌과 고모, 이모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지방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사랑스러운 조카의 실물을 보기 위해 6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를 여러 번 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각자의 생활이 있기에 아주 자주 만나긴 어렵지만, 인류 최대의 발명이라는 스마트폰 덕분에 사진과 영상이나마 매주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아이가 자라 가는 모습을 보며 울고 웃고 귀여워하느라 모두들 푹 빠져있다. 조금이라도 사진이 늦게 올라오는가 싶으면, 사진을 올려달라며 참지 못하고 한 마디씩 보탠다. 아이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무해한 미소와 배냇짓에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이틀 전, 그날도 모두가 아이의 사진을 언제 올려주냐며 재촉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두 명의 고모는 오매불망 그녀의 최신 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반에는 2~3일에 한 번, 그 뒤로는 매주 한 번씩은 귀여운 조카의 사진을 올려주던 오빠가 감감무소식인지 벌써 3주 가까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재촉한 보람이 있었는지 다음 날 조카의 사진과 영상이 서른 개 정도 올라왔다.


   오랜만에 올라온 사진에 넋을 놓고 귀여워하며 감상하고 있었다. 영상도 하나하나 어쩜 그렇게 귀여운지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 순간, 아마도 올케의 친정집에서 찍은 걸로 보이는 풍경 속에서 외할머니가 아이의 한쪽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 순간 “으아아아~” 소리 내며 힘을 주더니 양손으로 울타리를 꽉 잡고 서서 버티는 거다. 조카는 놀랍게도 꽤 오래 서 있는 시간을 즐기며 버텼다. 비록 마지막에 다시 꽈당하고 넘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던 시간에서 조금씩 꼬물거리며 움직이던 아이. 터미타임 할 때는 아빠와 눈을 맞추며 깔깔거리던 아이, 가족이 모두 다 같이 모인 날 배밀이를 계기로 여기저기 기어 다니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던 사랑스러운 조카는 드디어 인간에게 두 다리가 주어진 이유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중고등학교 가정 시간에 배운 내용이나 육아책을 읽어보아도 보통 15개월령 정도에 물건을 잡고 일어설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카는 현재 9개월이니 무려 6개월이나 빠른 셈이다.


   앞으로 다양한 물건을 붙잡고 점점 더 자주 일어날 수 있게 되고, 무언가 지지대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시기가 올 거다. 또 스스로 몸을 지탱하고 서서 첫걸음을 떼기 시작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걷기 시작하면 엄마와 아빠의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해지겠지만, 그녀가 자라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어 점점 더 행복하고 뿌듯한 왕고모가 될 거라는 사실은 분명한 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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