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살리는 말 글 공부_04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정신 활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감정은 살아있음의 증거이며 몸을 살리기도 하고 때로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감정이 극단으로 가거나 너무 오래 지속되면 몸을 상하게 하며 일상이 무너지거나 심각한 경우 자해에 이르기도 합니다. 젊은 베르테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너무 비관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인데, 이를 빗대어 유명인의 자살에 동조하여 자살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현상'이라고 합니다. 1933년 글루미선데이라는 노래가 발표되고 많은 사람들이 슬픈 곡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현상도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힘들었던 유럽의 상황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이러한 자각이 상실된 상태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애이불비(哀而不悲)
1) 슬프지만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음
2) 슬프기는 하지만 비참하지는 아니함 – 극단의 경계
애이불비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은 절제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때로 감정을 꾹꾹 눌러 외면하고 덮어두는 회피의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외면했던 감정은 언젠가 어떤 계기가 있을 때 폭발할 위험도 있습니다. 슬플 땐 슬퍼하고 후련해질 때까지 울기도 해야 합니다. 감정의 적절한 해소 과정, 자신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내적 부조화를 해소하고 새로운 감정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슬픔을 극복하고 자신을 추슬러서 비참함에 빠지지 않을 힘이 생기는 것이지요.
한의학에서는 일곱 가지 감정(喜怒憂思悲恐驚)이 지나치면 기의 흐름이 어지러워지거나 약해져 그에 따른 증상이 나타나고 병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화남, 우울, 슬픔은 물론 너무 기뻐하는 것도 경계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기의 흐름이 느려지고 신체의 기능도 느슨해진다고 보았습니다. 며칠 전 방문하신 환자는 너무 걱정이 없어 삶이 재미가 없어지더라는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다양한 감정이 교차해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지 않나 생각한 경험이었습니다. 분노가 지나치면 기가 거꾸로 솟구쳐 고혈압, 어지럼증, 이명 등이 생기고, 슬픔이 지나치면 기가 소모되어 살이 마르고 생명의 기운이 고갈됩니다. 일곱 가지 감정은 이렇게 저마다 과잉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키므로 한의학에서는 감정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 게 문제죠.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면 수많은 정신과 의원과 심리 상담이 왜 필요할까요. 혼자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고, 저마다 한편으로 애쓰고 한편으로 괜찮은 척 감추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떻게든 조절이 안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병식(病識)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병식이란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자각 또는 이대로라면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자각입니다. 병식이 있어야만 자신을 올바르게 마주하고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올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죠. 자각과 노력이 중요합니다. 본인이 자각을 하지 못하거나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할 때는 주변 사람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다독이고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같이 울어주고 안아주어야 합니다. 외롭지 않게 곁에 있어야 합니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통계에서 보듯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고 많이 아파합니다. 그러니 사회에 대한 병식도 필요합니다. 얼마 전 꽃다운 청춘들이 이태원 참사로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유가족은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에 빠져있을 것이고,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충격과 슬픔에 힘들어 합니다. 살아남은 모두가 '슬프지만 비참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고, 그리고 진실을 밝혀 억울함이 없도록 국가와 사회가 어루만지고 다독거려야 하겠습니다. 슬픔이 길어지고 깊어지면 생명의 기운이 소모됩니다. 슬픔이나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킬 수 없도록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의지하면서 슬픔의 강을 건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