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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청객 Dec 29. 2016

1.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엘리베이터에는 동생과 나, 그리고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두 명이 탔다. 이름 모를 어떤 아이의 장난이었을까. 엘리베이터는 유독 그 날 따라 층마다 모두 멈추어 섰다.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며 대화조차 조심스러웠지만 한 공간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가 먼저 시작된 쪽은 연인이었다. 여자가 먼저 운을 떼었다. "어떻게 저기서 저렇게 잘 수가 있지? 보기 너무 안 좋지 않아?" 우리가 탄 엘리베이터는 투명 유리 엘리베이터였고 여자는 아마 자기 눈에 보인 엘리베이터 밖의 누군가를 지칭하는 듯했다. "그러게 저게 뭐지. 노숙자처럼" 남자는 맞장구를 쳤다. 연인의 대화 속에 등장한 주인공은 억지로 찾으려는 노력 없이도 우리 자매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병원 로비에 비치되어있는 긴 의자에 한 아주머니께서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나고 연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모두가 오고 가는 공간에 모두를 위해 설치된 의자를 한 사람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보기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연인이 내린 후 우리 자매가 시작한 대화는 조금은, 달랐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함부로 말한다니까




병실에는 환자 침대 외에 보호자 침대라는 것이 있다. 엄마가 지독히도 아프기 시작하면서 우리 자매의 잠자리는 대부분 그 보호자 침대였다. 당연히 좁고 불편했다. 조금이라도 몸부림을 치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불안했다. 엄마의 부름에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해야 했으니 깊은 잠도 우리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이만한 잠자리 조차 허락되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보호자 침대에서 잠을 청해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터.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몸을 뉘일 수 있는 조금의 공간이라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 것은 어느덧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그 공간은 로비의 의자가 되기도 했고, 병원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던 이동형 침대가 되기도 했다.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피곤했고, 눕고 싶었고, 자고 싶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속 연인의 대화에 우리 자매는 선뜻 동조를 할 수가 없었다. 로비 의자에 누워있었던 그 아주머니는 나이기도 했고, 내 동생이기도 했으니까. 우리 자매와 그 아주머니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쨌든 우리의 행동으로 누군가는 피해를 봤을 수 있으니까. 피해를 본 누군가가 없다 해도 충분히 이기적인 행동이었으니까. 그래도 앞뒤 사정을 하나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너무나도 쉬운 비난이 안타까웠다.




또 하루는 이런 말을 들을 적이 있다. 같은 팀에서 일하던 과장님과 오랜만에 단 둘이 점심을 함께 한 날이었다. 시답잖은 여러 이야기들 속에서도 여름휴가철이었기에 휴가를 누구와, 어디로 가느냐가 가장 큰 화두가 됐다. 나는 가족과 여행을 갈 것 같다고 대답했고 같이 밥을 먹던 과장님은 말했다."가족이랑 너무 붙어 다니는 거 아냐? 휴가나 여행은 이제 그냥 친구들이랑 다녀" 어색한 침묵이 과장님과 나 사이에 흘렀다. 과장님의 그 말에 적절한 반응을 찾는 동안 대화는 다른 주제로 이내 옮겨갔다.




엄마가 암으로 진단받은 그 순간부터는 늘 오늘이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때문에 '다음에'라는 말과 함께 친구들과의 약속은 늘 후 순위가 되었다. 어떤 일이든 ‘꼭’이라는 전제가 붙지 않는 이상은 미루었다.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시간을 엄마와 함께 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과장님의 말에 반응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아프셔서요'로 시작되는 신파극을 점심 식사 자리에서 꺼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과장님의 그 말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기준에 따라 타인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여전히 그렇다. 두 번의 사건 후, 나는 타인을 쉽게 재단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만 이내 생각한다. ‘그럴만한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라고. 다른 사람의 앞뒤 상황을 완벽하게 모두 알 수는 없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타인이 나를 그렇게 섣부르게 판단하면 억울하지 않은가.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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