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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청객 Jun 28. 2017

2. 돈을 선물한 여자, 시간을 선물한 남자

지난 주말은 남자 친구와의 100일이었다. 100일 선물을 나에게 건네면서 남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나중에 나한테 공유해줬으면 좋겠어




이 말을 듣고 선물 상자를 열기 전까지 선물은 당연히 속옷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반전으로 상자에서 나온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제목은 [시를 잊은 그대에게]. 100일 선물로 책 한 권이라니.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여 책을 선물로 주고받는 것에 있어서 거부감은 없는 편이다. 그래도 그렇지. 큰 마음먹고 사 온 비싼 셔츠 하나와 정성스럽게 편집한 사진들로 만든 액자까지. 내가 준비한 선물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운했지만 남자 친구 앞에서는 그저 고맙다고만 했다.







물론 전혀 의미 없고, 뜬금없는 책은 아니었다. 나는 평소에 남자 친구 앞에서 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함께 갔었던 파주 지혜의 숲에서는 이 책을 보면서 읽어보고 싶다는 말을 서로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일 때문에 바빠서 비록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남자 친구는 선물을 살 때만 하더라도 시에 대한 자신의 감상평을 써서 그것을 함께 주고 싶었다고 했다. 시에 대한 감상평을 보면 내가 남자 친구에 대해서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나의 감상평도 꼭 ‘공유’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런 순수한 의미의 공유였다니)




문학적 감수성이 충만한 20대 초반의 나였다면 선물 상자를 열고, 남자 친구의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짐짓 큰 감동을 느꼈을 수도 있다. 굳이 20대 초반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아도 아무 의미 없는 어떤 날에 뜬금없이, 나에게 남자 친구가 책 선물을 건넸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물욕도 없는 편이고 가지고 싶은 것도 딱히 없는 나지만 100일에는 내심 특별한 선물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도 동생에게 한참 동안 푸념을 늘어놓았다. 동생으로부터 다음부터는 차라리 남자 친구에게 가지고 싶은 것을 명확하게 말해주라는 조언도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100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100일을 지나 보낸 어느 날, 오후부터 천둥과 함께 매서운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를 보니 퇴근길의 고행이 눈 앞에 훤했다. 늘 그렇듯 빨리 퇴근하고 싶었지만 이 폭우를 뚫고 퇴근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하철을 가득 메울 사람들과 습한 기운, 축축하고 기분 나쁘게 젖을 옷가지들. 그때 남자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같이 퇴근할까? 회사 앞에서 기다릴게




약간의 야근을 끝내고 회사 앞으로 나가니, 비는 그쳤고 대신에 1시간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남자 친구만이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나에게 남자 친구는 비가 많이 와서 내가 집에 가기 힘들 것 같아서 왔는데 비가 그쳐서 아쉽다고 했다. 또, 나에게는 일을 다 마치고 온 거라 말했지만,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외근지에서 바로 퇴근을 하느라 그 부분은 미처 확인을 못했으니, 나중에 다시 확인해보고 말해주겠다고 했다. 동네에 다 다르도록 나를 데리러 온 남자 친구의 정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는 오지 않았고 우리는 치킨과 맥주를 먹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 후 며칠간은 출퇴근길에 핸드폰을 잠시 내려두고 남자 친구가 준 책을 읽었다.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책을 읽을수록 내가 남자 친구에게 건넨 선물은 초라해지고, 남자 친구가 나에게 건넨 선물은 거대해지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멀리했던 책을, 그리고 시를 간만에 읽으니 좋았던 탓도 있지만, 정작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폭우가 쏟아졌던 그 날처럼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힘든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날이면 남자 친구는 자신의 시간을 아껴가며 나를 위해 시간을 썼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100일의 시간 동안 남자 친구에게 내 시간을 아껴가면서까지 시간을 쓰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날이면 남자 친구는 뒷전이 되었고, 모든 것이 귀찮은 날이면 일부러 전화를 피하기도 했다. 힘든 일이 있었다는 남자 친구에게 위로를 건넸지만, 남자 친구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직접 가서 위로를 해주는 정성도 없었다. 시간을 선물해주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를 이따금 돌아보며 반성했지만 100일에도 결국, 내가 남자 친구에게 선물한 것은 시간이 아닌 ‘돈’이었다.







결국 사랑은 시간을 선물하는 일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 <만추>를 보고 위와 같은 20자 평을 남겼다. 내가 <만추>라는 영화도, 이동진 영화평론가도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저 20자 평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렇게 곱씹다 보니 엄마가 매 순간 그리운 이유가 조금은 설명이 된다. 엄마가 나를 위해 건넸던 엄마의 수많은 시간들은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가 않으니까. 그리고 선물 받은 시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는커녕 짙어지니까. 그래서, 남자 친구가 나에게 선물하는 그의 시간이 참 고맙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시간이 두려운 요즘이다.




P.S. 그래도 그렇지, 남자친구님아 100일 선물로 아무리 생각해도 책 한 권은 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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