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의 굴레
감사
1.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
2. 고맙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
독립을 하고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들 중 하나.
내 머리카락이 이렇게나 많이 빠진다고?
내가 아빠를 닮아서 머리카락이 잘 빠진다는 것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는 하루에 빠지는 내 머리카락의 양을 온전히 가늠할 기회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엄마가 태어날 때부터 ‘나는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름표를 달고 나온 것도 아닌데 집안일은 당연히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파렴치하고 몰상식했다. ‘도와드릴까’라는 생각 자체도 웃기지만 (도와드린다는 말부터가 집안일의 주체는 항상 엄마여야 한다는 가정이지 않은가) 그 웃긴 생각조차도 못했던 사람이 나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아빠와 동생, 내가 집안일을 나름대로 분배해서 했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분배였다. 실상은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빠의 바람으로 아빠가 거의 집안일을 전담하듯이 했다. 그래도 약간의 죄책감을 느낄 때면 함께 집안일을 했지만 회사 일이 힘들어서, 주말에 친구들과 놀러 가야 해서, 하기 싫어서 등등. 다양한 핑계를 만들어가며 집안일을 최대한 모르는 척했다.
독립을 하고 상황이 달라졌다. 어지르는 사람도 나뿐이지만 그것을 치우고 정리하는 사람도 오롯이 나 하나였다.
그제야 하루에 빠지는 내 머리카락의 양이 말도 안 되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 샤워 후 욕실에, 자고 일어난 침대 위에, 머리를 말리고 난 후 화장대 근처에, 머리카락은 쉴 새 없이 쌓였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속도가 머리카락을 치우는 속도를 한참이나 앞섰다. 머리숱이 많지만 매일같이 이 정도 양의 머리카락이 빠진다면 곧 대머리가 될 것 같았다. 머리를 화끈하게 밀어버리면 머리카락을 무한히 치워야 하는 톱니바퀴의 여정도 끝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도 해봤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 것은 딱히 어디에 쓸만한 재능도 자랑거리도 아닌지라 억울하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내 머리카락을 내가 치워도 힘들고 짜증 나는 순간이 숨 쉬듯 찾아오는데 어떻게 엄마와 아빠는 본인들의 머리카락도 아닌 것을 대체 어떻게 군말 없이 치울 수 있었던 걸까.
진작에 독립을 해서 더 빨리 어른이 되었어야 한다는 후회를 하다가도 문득 정규 교과과정이 내 분노의 타깃이 된다. 살면서 쓸 일이 없는 쓸데없는 공식들을 외우게 하는 것보다 ‘하루에 빠지는 본인의 머리카락을 몽땅 수집해보고 어마 무시한 양의 머리카락을 매일 깨끗하게 치워 주시는 부모님께 감사의 편지 쓰기’와 같은 실습을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지? 민망하니까 괜히 어이없는 화를 내본다.
자율주행차도 나올 만큼 기술이 발전한 이 시대에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집안일에 대한 가치는 조선시대 그 어느 즈음에 멈춰있다. 나 역시도 생각이 고리타분했다. 하지만 독립을 한 후, 머리카락 치우기를 포함하여 집안일을 하는 모든 이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물론, 본인이 어지른 것을 치우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남이 어지른 것을 치워주는 집안일을 하고 있는 이에게는 경이를 담아 큰 찬사를 보낸다. 특히, 우리 엄마와 아빠에게 미안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