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청객 Sep 13. 2022

일곱, 시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시야 

1. 시력이 미치는 범위 
2. 사물에 대한 식견이나 사려가 미치는 범위






독립을 하면서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불 끄고 혼자 잠들기’였다. 33살이 아니라 3살짜리가 할 법한 이야기지만 진지하게, 정말로 그랬다. 다소 민망하니까 핑계처럼 들릴지는 몰라도 어릴 적의 트라우마를 꺼내 보겠다.



유치원 시절 집에 혼자 있을 때 도둑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예의 있는 도둑이었다. 먼저 집을 뒤지지 않았고, 나에게 엄마가 보통 귀금속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아냐고 물었다. 내 대답을 듣고는 그는 장롱 속에서 귀금속 몇 개를 가져갔고, 나를 해치지는 않았다. 집을 나설 땐 본인과 같은 사람이 오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말고 엄마가 올 때까지 문을 꼭 잠그고 있으라는 이상한 당부도 하고 갔다. 분명히 이 모든 일은 대낮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그 후로 나는 집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워졌고 밤이 되면 증상은 심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트라우마도 옅어진 걸까. 그게 밤이건 낮이건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어느 정도 괜찮아졌지만, 불을 끄고 혼자 잠을 자는 것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었다. 아니,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기숙사에 들어온 첫날. 불을 환하게 다 켜고 잘 줄 알았는데 이사가 피곤했는지 긴장한 탓인지 불을 다 끄고 잤다. 첫날이라 그랬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로도 나는 불을 잘만 끄고 잤다.



내가 불을 끄고서 혼자서도 잘 잔다는 게 인지되자 궁금해졌다. 물리적으로 갑자기 독립된 삶을 살게 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심리적으로도 독립된 사람이 되었을 리는 없다. 트라우마라는 말이 원래 그렇듯 강렬한 계기가 있지 않은 이상 갑자기 극복될 리도 없지 않은가. 그러다가 유레카. 내가 얻은 결론.



‘내가 볼 수 있는, 그래서 내가 통제가 가능한 공간에서는 불을 끄고 자는 것이 무섭지 않은 거네’



기숙사 방은 한눈에 보일 만큼 작았다. 불을 꺼도 모든 것이 내 손 안이었다. 상상을 하기에는 공간이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원래 살던 집은 내 방을 제외하고는 내가 볼 수 없는 공간이 너무 많았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상상만 늘어갔다. 그래서 나는 불을 끄고 혼자 자는 게 무서웠다. 그걸 그냥 트라우마로 곱게 포장했을 뿐.



결국 나는 표면적으로는 불을 끄고 혼자 잠을 자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그 이면에는 내가 볼 수 없는, 그래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무서워했던 것이다. 내가 전반적으로 두려움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도 이 분석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미래에서 상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 내가 그것들을 통제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나는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동전의 앞 뒷면처럼 생각을 달리 해보니, 무서워할 것이 전혀 없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 그것에만 집중하니 트라우마 마저도 극복 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때로는 시야를 넓히는 것보다 좁히는 것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짐해본다. 지금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곳. 내 눈앞에 보이는 것, 그래서 내가 통제 가능한 것들. 그것에만 집중하자고. 그렇게 하면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전 06화 여섯, 감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