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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블 May 21. 2020

노란 포장지의 위로

나를 위로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

"종이컵 안에서 커피 향이 코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향을 최대한 음미했다. 어린 시절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기고선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나에게서도 흘렀다. 그렇게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넘기면서 내 몸에 돋아난 가시들을 다시금 가라앉혔다."




얇고 길쭉한 노란색 모양의 포장지를 뜯어낸다. 포장지를 종이컵으로 기울여 포장지 속 가루를 쏟아낸다. 정수기 빨간 버튼 아래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낸다. 종이컵에 물이 차오름과 동시에 가루는 연한 갈색으로 변한다. 티스푼으로 휙휙 저어 내니 작은 거품이 생긴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완성까지 1분이 소요되지 않는 간편하고도 최고의 식품, ‘커피믹스’다. 


커피믹스의 첫 기억은 할머니 댁이었다. 식사 시간이 끝나면 엄마는 곧장 부엌으로 가셔서 방에 있는 어른 수만큼의 커피를 내어오셨다. 방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옴과 동시에 방안에 퍼지는 부드러운 커피 향을 맡고 있으면 꼬마였던 나도 그 자리에 있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엄마 옆에 꼭 붙어 앉아 커피잔이 엄마 입술에 닿아 입안으로, 그리고 목으로 넘어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함께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는 어른들의 표정은 모두 편안해 보였다. 날카로운 눈빛은 순한 강아지처럼 변했으며, 입꼬리는 길게 늘어져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좋아 보였던 나는 종종 어른들이 남긴 커피를 탐냈다. 평소에는 “어린이에게 커피는 좋지 않아.”라고 말씀하시던 엄마였지만, 어떤 날은 뚫어지게 쳐다보는 내 눈빛에 못 이기는 척 남은 커피를 주시곤 하셨다. 찻잔의 밑바닥이 보일 정도의 양이었지만, 그 커피의 맛은 세상 어떤 과자보다도 달고 맛있었다. 후후 불어먹을 만큼 뜨겁지 않아도 목구멍으로 들어온 미지근한 커피는 카라멜을 연상시키면서도 카라멜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맛이 났다. 그때의 내 나이보다 10살쯤 많아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 뒤 다시 커피믹스와 마주하게 된 곳은 첫 직장이었다. 20살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간단한 서류 업무와 청소, 그리고 종종 사무실 직원분을 따라가 함께 커피를 타곤 했었다. 종이컵 물 양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막상 그것을 혼자서 탈 때는 물 양을 가늠하기 힘들어 정수기에 여러 번 물을 따랐다. 물 양을 가늠하지 못하여 어떤 날은 괜찮은 커피가, 또 어떤 날은 싱거운 커피가 되어버렸다. 스무 살이 되어 커피를 마음대로 마실 수 있게 되었지만, 다시 맛본 커피는 어린 시절 엄마가 남겨준 커피보다 맛있지 않았다. 사회생활 연차가 늘어갈수록 커피를 타는 실력도, 커피를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변해갔다.


사회생활 7년 차가 넘고서는 남을 위한 커피가 아닌 나를 위한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졸음을 쫓기 위해서였다. 점심 이후 나른해지는 오후 2~3시경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 잔은 바쁜 업무시간 여름날의 소나기 같은 존재였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여름 햇볕 같은 업무에 지친 몸을 커피믹스 한 잔이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커피믹스는 사무실 생활의 작은 기쁨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메리카노가 대중화되면서 커피믹스는 몸에 좋지 않은 식품으로 분류되었다. 그런 기사들이 넘쳐나도 고된 회사생활의 낙원 같은 커피 한 잔을 사라지게 하진 못했다. 아침부터 꼬여버린 업무를 풀기 위해, 상사의 억지스러운 업무지시에, 고객의 끝없는 수정 요구에서 나는 숨 쉴 곳을 찾기 위해 커피를 찾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옥상 구석에서 하늘을 보며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종이컵 안에서 커피 향이 코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향을 최대한 음미했다. 어린 시절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기고선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나에게서도 흘렀다. 그렇게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넘기면서 내 몸에 돋아난 가시들을 다시금 가라앉혔다. 


정글 같은 직장생활을 견뎌내는 갑옷은 내게 없었다. 다만 그 커피 한 잔으로 누군가의 말로 상처 난 곳을 덮어주는 반창고가, 뜨거운 여름 햇볕 같이 내리쬐는 업무에서 쉬게 하는 그늘로 커피 한 잔은 나를 보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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