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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cado Jan 06. 2024

마음에 드는 미용사를 만나는 일은 정말 천운이다

     나는 외곬이 깊어 한 번 마음을 정하면 그 마음이 쉬이 바뀌지 않는다. 이는 취향과 삶의 방식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즐겨 듣는 음악도, 자주 보는 책과 영화도, 즐겨 찾는 장소도, 음식도 모두 하나로 정해진, 취향 객관화가 잘 정립된 인간이다. 

     미용실도 그렇다. 아주 오래전, 이대생이던 전 여자 친구는 은하미용실의 단골이었다. 그녀를 담당하던 A 헤어드레서 선생님은 독립 후 새로운 살롱을 오픈하셨고, 살롱은 그녀의 집에서 1시간을 운전해야 했던 먼 거리였음에도 하루의 스케줄을 모두 비워가며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다. 그 무렵 그녀가 나와 연애를 시작했고, 우리는 데이트 과정에서 매달 1회씩 그 살롱에 방문해 커트와 관리를 받았다. 


     보통 미용실에 가면 첫 방문 손님에게는 스타일북을 펼쳐 주면서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지목하면 그대로 세팅해 주겠다는 식으로 응대한다. 그런데 여기는 달랐다. 

     헤어드레서 선생님께서는 나를 의자에 앉힌 후 한참 동안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빗질하며 쓰다듬고 만지면서 내 두상, 두피, 모질의 단점을 파악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느낌대로 나의 얼굴형과 스타일에 어울릴 자연스러운 커트를 해 줄 터이니, 일단 커트를 해보고 혹시 마음에 안 들면 수정을 해주겠다고 하셨다. 

     자신감에 찬 눈빛과 가위질은 흡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라처럼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이 선생님과 함께라면 보다 나답게 멋져 보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후로 8년 동안 나는 미용실을 바꾸지 않았다. 태풍이 몰아쳐도, 폭설이 내려도, 심지어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어도 꾸준히 이 살롱에 다녔다. 


     비단 헤어 커트, 스타일 유지와 관리를 잘해주는 기술적 측면에만 만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담 없이 편안하게 해주는 접객 스타일과 종종 나누는 대화의 주제도 정말 좋았다. 선생님께서는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틈틈이 독서하는 습관을 놓지 않는다고 하셨고, 살롱의 창가에는 흔하디 흔한 베스트셀러가 아닌 굉장히 수준 높은 철학서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살롱에 도착한 날이면 아무 책 한 권을 집어 선생님께서 모서리를 접어놓은 장을 펼친 후 밑줄 친 부분이나 짤막한 메모를 읽고는 했다. 그러다 내 차례가 오면 아까 읽은 책을 언급하면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께서는 살면서 풀리지 않던 의아함은 항상 책을 통해 해소가 된다며 그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눠주셨다. 아는 척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톡 하고 내 머릿속에 그 생각을 놓아주시는 화법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방문 전에 통화로 예약 시간을 조율할 때, 이따금 원장님께서는 "이 날은 x시에 xx 씨 예약이 있어서 다른 날이 좋겠어요."라며 내가 전 여자 친구와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직업을 떠나 성숙한 여성의 표본처럼 느껴질 정도로 품행, 워딩, 교양 모두 멋진 분이셨다. 

     그러나 모든 만남의 끝에는 이별이 있다. 헤어드레서 선생님께서 일신상의 이유로 은퇴와 폐업을 결정하셨고, 나는 미용실 유목민이 되었다


     미용실 유목민이 되면서 친구 따라 강남의 유명 헤어살롱도 다녀봤고, 인터넷에서 평점이 높은 미용실 몇 곳도 다녀봤다. 그러나 나에게 적합한 커트를 해주는 느낌이 아닌, 정형화된 커트 형식에 나를 끼워 맞추는 느낌을 받아서 발길을 끊었다. 나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이후로 내 삶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오며 연고 없는 지역으로 거소를 옮겼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도 큰 기대 없이 두 곳의 새로운 미용실에서 커트를 받아봤는데, 계획에도 없던 염색과 펌으로 스타일 변화를 권장하며 객단가를 올리는 일에만 치중했을 뿐, 결과는 그다지 마음에 차질 않았다. 

     미용실 유목민에게 피용자, 세입자, 배우자를 찾는 일보다 훨씬 힘든 것은 내 마음에 쏙 들도록 커트 잘하는 미용사를 찾는 일이다. 마음에 드는 미용사를 만나는 일은 정말 천운이다. 





     그러다 세 번째 도전했던 동네 미용실에서 운명처럼 마음에 드는 헤어드레서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의 예명이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에서 부여를 통일하러 온 아산의 전설과 같았다. 이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첫 방문 전, 네이버예약 당시 요청사항 기재 란에 내 두상, 두피, 모질의 단점을 나열하면서 원하는 바를 명확히 글로 작성해 의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예약 당일 미용실에 방문했다. 선생님께서는 환한 미소로 인사하며 옷가지를 받아준 후 자리를 안내했다. 

     커트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께서는 예약 페이지의 요청사항을 나처럼 자세하게 작성하는 사람은 그동안 없었다며, 어떤 방식으로 커트를 할 것인지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의 요청사항을 꼼꼼하게 읽어봤다는 점, 다방면으로 깊은 고민 끝에 내게 적합한 헤어 커트 솔루션을 제시한다는 점, 본격적으로 커트에 임할 때의 눈빛이 자못 진지했던 점들까지 모두 좋았다. 

     그날 나는 이 선생님이라면 분명 믿고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헤어 커트의 결과 역시 만족스러웠다. 뜻밖에도 동네에서 이렇게 친절하고 섬세하면서 헤어 커트에 통달한 미용사를 만났다니 기적처럼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네이버예약에 사진과 함께 장문의 후기를 남겼고, 선생님께서는 후기가 고맙다며 몇 번이나 두피 스케일링, 다운펌 등의 서비스를 베풀어 주셨다. 


     첫 만남 때 일반 헤어디자이너였던 선생님은 팀장 승진에 이어 부원장 자리에 빠르게 올랐다. 실력이 좋은 분이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당일 예약은 어려웠고 늘 빈 예약 시간을 찾아서 내가 맞춰야만 했을 정도였다. 

     미용실 방문 회차가 누적될수록 우리의 사담은 깊어졌고, 서로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면서 심적으로 가깝게 지냈다. 연고 없던 낯선 도시에서 처음 친해진 사람이자, 유일한 동네 지인이 헤어드레서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여자친구와 호캉스를 하고 싶은데 어떤 호텔로 정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일정을 여쭤보니 마침 그날 나도 호텔 투숙 일정이 있었고, 그동안 너무 과분한 서비스를 받았던 게 늘 마음에 걸렸던 나머지 괜찮다면 내가 투숙할 호텔로 예약해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자고 권했다.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제안을 받으셨고, 나는 곧장 다이닝을 예약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사석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선생님의 업을 늘 존중했기 때문에 그동안 단 한 번도 말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형 동생이라 부르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와인 3병을 마셨고, 각자의 객실에서 잠시 쉬다가 이런 만남과 시간들이 흔치 않을 것이라며 저녁에 다시 나의 객실로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 

     선생님께서는 지역 전체 헤어디자이너들 중에서 2위에 랭크될 정도로 유명세도 올리고, 매출도 많이 오르면서 조직에서 빠른 승진까지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 그 시작이 모두 나의 리뷰 덕분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헤어스타일을 믿고 맡기는, 내가 좋아하는 헤어드레서 선생님께서 일이 잘 풀린다니 내 마음이 다 기뻤고, 그 계기가 나의 리뷰였다고 느끼셨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래서 우리는 항상 말을 예쁘게 잘해야 한다. 특히 이런 대화를 나눌 때마다 우리의 언행은 나비효과와 카르마를 일으킨다고 느낀다. 


     따지고 보면, 기회는 반드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다들 바쁘게 사는 소도시라서 선생님의 손길을 거친 손님들이 많지 않았을 뿐이다. 그동안 은둔 고수처럼 깊은 못에 계셨는데, 내가 그 잔잔한 못에 리뷰라는 조약돌 하나를 던지자, 우연히 선생님께서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한 사람의 좋은 경험이 담긴 리뷰가 다른 사람에게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경험이 만족되면 또다시 좋은 경험이 담긴 리뷰가 또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이 발생했을 뿐이다. 

     결국 선생님의 실력이 뛰어나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일어난 것이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선생님의 실력과 진가를 알아본 고객이라면 언젠가 분명 좋은 리뷰를 써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마음에 드는 미용사를 만나는 일은 정말 천운이다. 생각할수록 내 앞에 선생님 같은 귀인께서 나타나 주셨으니, 내가 엎드려 절을 하고 싶었을 정도로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모든 만남의 끝에는 이별이 있다. 헤어드레서 선생님께서는 더 나은 비전과 나아갈 방향을 정해 타지로 떠나셨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는 능력, 실력, 인성까지 모두 뛰어난 분이라 그곳에서도 분명 실력 좋은 멋진 미용사로 입소문을 타고 번영의 길을 걷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 Pecado 

글: Pec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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