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암 환자들이 자주 찾는 숲이 있다. 바로 편백 나무 숲이다. 편백 나무는 침엽수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나무로 유명하다. 피톤치드가 많은 곳에서 산림욕을 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면역력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암 치유에도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들을 취재하기 위해 전남 장성의 축령산 편백나무 숲으로 갔다.
그런데 촬영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암 환자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방송 출연을 꺼렸기 때문이다. 치료에 전념하고 싶을 뿐, 괜히 방송에 나갔다가 오해나 불필요한 주목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담당 PD는 딱 한 사람만 간신히 인터뷰를 하고 돌아왔는데, PD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현아, 그분들 예쁜 모습 많이 찍어 줘.”
다음날 PD와 함께 다시 나무 숲으로 갔는데, PD가 의외의 말을 했다. 촬영 팀이 어제 예고도 없이 찾아가 환자들 마음을 불편하게 한 건 아닌지 마음이 쓰여서 안 되겠다고. 그러니 오늘 다시 찾아가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마음 편히 지내길 바란다고 전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의 일이 중요한 만큼, 내가 만나는 사람의 인생도 중요하다. 특히나 다른 이의 생을 기록하고 그 의미를 찾는 프로그램을 하는 우리에게 사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방송 아이템으로만 대해 온 건 아닐까. 그 어떤 순간에도 사람을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말기 암 환자에게는 내가 촬영한 모습이 마지막 기록일 수 있다는 생각에 PD는 최대한 예쁘게 찍는 걸 우선으로 하라고 말한 것이다.
이 방송이 나가고 나서 시청자들로부터 암 환자를 응원하는 글들이 쏟아졌고 그때 나는 배웠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 사람을 이용하거나 괴롭히지 않고 사람을 배려하면서도 충분히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을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되고, 늘 일보다 사람을 앞에 두어야 하는 이유다.
★ 세상에는 다정한 사람이 훨씬 많다.
2008년도의 일이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헌혈을 했다는 구로 헌혈의 집을 취재하게 되었다. 헌혈의 집은 크지 않았고 취재진들이 들어가 찍기에는 협소하였다. 담당 PD가 다가와 잠깐만 얘기 좀 하자고 하더니, 대뜸 나를 구석에 앉히고 헌혈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그냥 지켜보자고 했다. 취재할 시간도 넉넉지 않은데 그냥 바라보라는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PD가 나한테 물었다.
“왜 압구정이나 홍대가 아닌 구로 헌혈의 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헌혈한 걸까?” “글쎄요, 몇 분 만나 보니 그다지 여유가 없는데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오셨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왜 여유가 없는데 사람을 돕고 싶어졌을까?”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헌혈을 하고 나가면서 좋은 일을 하고 나니 기분이 참 좋다고 하셨어요.”
그 이후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니 신기하게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각자의 삶에서 생긴 결핍, 잊지 못할 도움을 받았던 기억, 헌혈하는 사람이 줄고 있다는 뉴스, 잠깐만 시간 내면 되는데 사람까지 살릴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좋은 일 하러 왔다는 이야기 등등..
고백하건대 나는 ‘다큐 3일’을 하기 전에는 적자생존이라는 논리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고 타인은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상대로 보기도 했고, 착하면 호구가 될 뿐이라는 말도 새겨듣곤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대부분 다정했다.
그래서 나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당하게 말한다.
“저는 15년간 다양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났죠. 그래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세상에는 다정한 사람이 훨씬 많아요.”
★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재능이 있고 노력을 하는데도 안 될 때가 있다. 사람 일이라는 게 타이밍과 운도 중요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단계에서 미끄러질 때도 있다. 그럴 때 참 힘이 빠진다.
재정비하고 다시 도전을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약해지고 자신 없어질 때 나를 믿어 주는 누군가의 말에 힘을 냈던 순간이 있다.
잘하고 있다고,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한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거냐고. 때론 현명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만날 수 있지만 오랜 세월 곁에서 격려를 넘어서 무조건적으로 신뢰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은 한 다큐멘터리 디렉터이자 작가가 쓴 수필집을 함께 보았고 그중 3편 정도를 뽑아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체이자 글에서 글쓴이의 향기가 느껴지게 되는데 작가의 글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이 비단 저자만이 아닐텐데 이렇게 사람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고 올바른 삶의 의미를 찾는 이는 드물겠지요.
삭막하고 무한경쟁, 각자도생의 현대 삶에서 저자는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힘과 따뜻함을 발견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과,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각박하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말, 그리고 이 세상 다 나를 힘들게 해도 나를 믿어주는 단 한 명만 있어도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말. 이 말들이 오늘을 살게 하고 내일을 희망으로 바라보게 하는 말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