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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0. 2016

<빵의 지구사>

윌리엄 루벨

<빵의 지구사> 윌리엄 루벨
 
                               강 일 송
 
오늘은 우리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주식 중 하나인 “빵”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빵은 유럽을 비롯해 세계의 절반 이상의 지역에서 주식으로 먹는다고 합니다.
가장 권위있는 영어사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나오는 빵의 정의는
“곡물가루나 밀가루에 수분을 더해 반죽을 치대어 구운 잘 알려진 음식의
하나로 보통 이스트나 팽창제를 첨가하여 만든다“입니다.
 
물론 반죽을 치대어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그 정의에 맞지 않는, 치대지 않은
묽은 반죽으로도 다양한 빵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요,
북아메리카에서 즐겨 만드는 여러 형태의 옥수수빵은 이 정의에 벗어나는
대표적인 빵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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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처음 빵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비옥한 초승달지대(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를 따라 발생한 고대 문명의
경제적,영양적 기반이 빵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우르크문명(BC 4500년전 수메르 고대 문명)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에
빵이 있었다. 빵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을 뒷받침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권의 주식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패권을 잡은 19세기까지도 유럽인 대부분의 주식
은 빵이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력은
이들 나라의 드넓은 밀밭과 전혀 상관없다고 할 수 없다.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과 목축으로의 사회적 전환이 일어나는 신석기 혁명 이전
에도 비옥한 초승달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드넓은 야생 보리밭과 밀밭에서 곡식을
수확해 먹었다. 고고학자들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빵의 역사는 적어도
2만 2500년전 야생 곡식을 먹던 시절, 즉 농경과 목축, 사유재산의 축적이 채
자리를 잡기전 시절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날곡식을 먹고 살 수 없다. 날곡식을 소화시킬 만큼 치아와 위장이 발달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곡식을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리를 하여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곡식을 먹기 좋게 만드는 방법에는 발아, 발효, 끓이기, 볶기, 굽기가 있다.
곡식을 갈아서 빵으로 구워먹으면 통곡식으로 섭취할 때보다 소화 흡수율이
높아져 탄수화물의 혈당지수가 크게 올라간다.
또한 빵은 저장하기가 쉽고 휴대할 수 있어 곡식으로 죽을 끓이거나 술로 발효
시키는 것에 비해 훨씬 실용적이다.
 
빵은 부풀려야 하는데, 그 대표적인 방법은 세 가지 있다.
1) 얇은 반죽에 강한 열을 가해 반죽에서 나오는 증기로 부풀리는 방법
2) 공기 중의 유산균(lactobacilli)을 이용해 자연적으로 발효시키는
사워도(sourdough) 발효법
3) 이스트를 첨가해 발효시키는 이스트 발효법
 
이스트는 술 양조장에서 빵을 굽는 사람들에게로 전해져 수천 년 동안 사용되고
있는 사카로미스 세레비시아(saccharomyces cerevisiae)를 가리킨다.
플랫 브레드를 만들 때에는 세 가지 방법을 모두 쓸 수 있지만, 식빵 같은 로프
브레드를 만들 때에는 사워도 발효법이나 이스트 발효법을 써야 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사림들이 수렵,채집(성경 속 아담과 이브의 직업)생활을 포기
하고 농경(성경 속 카인의 직업), 목축(성경 속 아벨의 직업)생활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고고학자들이 당시 사람들의 뼈를 연구한 결과 수렵,채집을 할 때 오히려 더 건강했
으며 농경문화를 받아 들이고 특히 빵을 주식으로 삼은 것이 모두에게 최선은 아니
었다. 18세기 루소는 농경 도입으로 노예제도가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성경과 유대인의 신화에서도 농업은 부정적으로 비춰진다. 최초의 농부였던 카인은
가장 처음 살인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하며, 비자발적 노역으로 도시를 세운 인물로
그려진다. 유대신화에서 불신의 상징인 저울과 자를 끌어들인 자도 카인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쫒겨난 뒤 빵을 얻기 위해 심한 형벌처럼 느껴지는
고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곳으로 가게 된다.
실제로 영세 농민이 손에 호미나 쟁기를 들고 밭에서 일을 하거나 낫으로 밀을 베는
모습을 보면 농사가 얼마나 고된 일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싹튼 기독교의 중심에도 빵이 있었다.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는 어떤 형태로든 교회에 빵을 끌어 들인다.
해석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교리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과 빵”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빵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빵은 종교의 중심이자 삶의 중심이었다.
빵의 역사에서 빵은 항상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녀왔다.
 
로마가 멸망하고 1000년이 훨씬 지난뒤에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
가 발표한 시 한구절을 감상하며 마치고자 한다.
문화마다 빵이 다르듯 문화마다 신에 대한 생각이 다름을 감안한다면 빵문화권
의 모든 이가 이 시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공감할 것이다.
 
 
오늘 빵과 평화가 나에게 오게 하시고
태양 아래 다른 모든 것은
주셔야 하는지 아닌지 당신이 가장 잘 알고 계시니
당신의 의지대로 하소서
 
<보편적 기도문>중에서,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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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주위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빵”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책의 말미에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빵을 먹었는지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일제 치하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빵을 접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어 “빵”은, 일본인들이 18세기 포르투갈어 “팡데로 Pao-de-lo"를
“팡”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한국어 “빵”이 생겨 났다고 합니다.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밀은 주로 겨울에 파종해서 한여름인 음력 6월에야 추수를
하는 겨울밀인데, 그것도 황해도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겨울밀은 봄밀에 비해 글루텐 성분이 적어서 빵을 만들려고 해도 반죽이
쉽게 되지 않았다고 하구요.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빵의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캐나다산밀이 강력분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빵의 재료로 가장 알맞아 많이 사용했다 하네요.
 
군산의 “이성당”, 옹진의 “상미당” 등이 해방이후 일본의 빵기술로 열었고, 이후
1950년대 중반이후, 독일빵집, 뉴욕빵집, 뉴시카고 같은 서양식 이름의 빵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60-70년대에 뉴욕제과, 고려당, 태극당, 신라명과 등이 유명했고, 양산업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59년 “삼립산업제과주식회사”가 용산에 문을 열었는데,
그 모태는 “상미당”이었습니다.
이후 삼립과 샤니로 분리된 후 샤니가 파리바게뜨, 파리크라상 등의
프랜차이즈 빵집을 열어 성공하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빵의 기원과 고대로부터의 역사를 보고, 이후 한국에서의 빵의 역사를
한 번 되짚어 봤습니다.
우리의 주식은 당연히 쌀로 지은 “밥”이지만, 현재 쌀은 소비가 줄어 남아돌고 있고
빵은 서구화된 식단으로 예전보다 우리 주위로 더 가까이 온 듯합니다.
 
인류의 역사의 매 순간을 함께 해온 빵!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인생을 안다고 한 그 빵!
 
알렉산더 포프의 시처럼
“빵과 평화” 외에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인간들 모두에게
앞으로의 미래에도 풍성한 빵의 역사가 계속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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