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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릭 프롬

To Have or To Be

by 해헌 서재

<소유냐 존재냐> 에릭 프롬, 차경아 역
- To Have or To Be

강 일 송

오늘은 에릭 프롬의 유명한 책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자인 에릭 프롬(1900~1980)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사회학, 심리학, 철학을 공부하였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
를 받았습니다.
1933년 나치를 피해서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할 즈음 정신분석
학자로서 명성이 높아 정통 프로이트 학파와 대립을 하기도 합니다.
예일대학교, 뉴 헤이븐대학교, 미시간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 <사랑의
기술> 등이 있습니다.

한번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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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와 존재의 차이의 중요성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소유(To Have)냐 존재(To Be)의 양자택일이
있을 수 없다. 우리 눈에는 소유한다는 것이 삶에 포함된 지극히 정상
적인 행위이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사물을 당연히 소유한다.
그뿐이랴, 사물을 즐기기 위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하는 것을, 점점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지향하는 사회 속에서
존재의 본질이 바로 소유하는 것에 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하지만 일찍이 인생의 위대한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의 양자택일에서
그들의 철학적 관점의 핵심을 찾아냈다.
석가모니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도야의 최고 단계에 이르려는 사람은
제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설법한다. 또한 예수는 “누구든지 제 목
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 누가복음, 라고 말한다.

수사(修士) 에크하르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어서
“비우는 것”, 자아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는 것이 영적 부와 힘을 얻는
전제라고 가르친다. 또한 마르크스는 사치야말로 빈곤과 마찬가지로
큰 악덕이며, 우리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소유와 존재에 대한 문제는 수년 전부터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의 고찰이 이끌어낸 내용은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 문학에 나타난 예

소유적 실존 양식과 존재적 실존 양식의 차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고인이 된 스즈키가 “선종(禪宗)에 대하여”라는 강론에서 인용한 유사
한 내용의 두 편의 시를 여기에 재인용하기로 한다. 그중 한 편은
일본 시인 마쓰오 바쇼가 지은 하이쿠이며, 다른 한 편은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이다. 두 시인 모두 동일한 체험, 즉 산책길
에서 본 꽃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데니슨의 시는 다음과 같아.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째로 손안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그러나 만약 내가
뿌리째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신(神)과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련만.

그리고 바쇼의 하이쿠는 다음과 같다.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두 편의 시의 현격한 차이는 얼른 눈에 띈다. 꽃을 본 테니슨의 반응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그는 꽃을 뿌리째로 뽑아든다.
꽃에 대한 그의 관심은 꽃의 생명을 단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꽃이 신과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으리라는
지적 사색으로 끝을 맺으면서 말이다. 이 시에서의 테니슨은 생명체를
해부하면서 진실을 추구하는 서구 과학자들에게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꽃에 대한 바쇼의 반응은 판이하다. 그는 꽃을 꺾으려고 하지 않
는다. 그것을 건드려 보려고 조차 않는다. 그는 ‘알아보기’위해서 다만
‘눈여겨 살펴볼’ 뿐이다.

테니슨은 사람과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히 꽃을 손에 쥘 필요가
있었고, 꽃은 그의 소유가 됨으로써 파괴된다. 바쇼는 다만 바라보기를
원한다. 또한 꽃을 그냥 관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꽃과 일체가 되기를,
꽃과 결합하기를 원하다. 그러면서 꽃의 생명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꽃과의 관계에서 테니슨이 보여주는 특성은 소유양식, 또는 소유욕의 양식
에 속한다. 이 경우에서는 물론 물질적 소유가 아닌 지적소유이다.
바쇼와 꽃에 대한 관계는 존재양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지금 내가 “존재”
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
을 의미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차이가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의
차이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을 중심으로 여기는 사회와 사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지향은 돈, 명예,
권력에의 탐욕이 삶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버린 서구 산업사회 인간들의
특징이다. 중세사회나 인디언사회, 또는 특정한 아프리카 부족사회처럼
현대적 ‘진보’사상에 감염되지 않은 덜 소외된 사회에는 그들 고유의 바쇼
가 살아있다. 그런가 하면 산업화를 몇 세대 거치고 난 뒤의 동양인은
어쩌면 그들 고유의 테니슨을 가지게 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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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소유적 삶(To Have)”과 “존재적 삶(To Be)”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유냐 존재냐"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영어로
“To Have”, “To Be”라고 들었을 때 더 뜻이 쉽게 다가오더군요.

우리 현대인은 “소유적 삶”에 매여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는 존재적
삶을 사는 사람은 “현재, Now”에 중점을 두고, 소유적 삶을 사는 사람은
과거와 미래에 중점을 두고 산다고 합니다.
현대인은 필연적으로 소유적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질적 가치,
경제적 가치가 최우선으로 여겨지는 현대에서 당연히 그러하겠지요.

하지만 선현들은 하나같이 소유의 삶보다는 존재의 삶을 실천하였고 또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때론 동양적, 서양적 사고의 차이로도 설명을 하기도 하는데, 영국의 시인
테니슨과 일본의 시인 바쇼의 시를 가지고 저자는 예를 듭니다.
대체로 분석적인 성향을 가지는 서양이기에 테니슨은 꽃을 꺾어 들고 나서
분석하고 사유를 합니다. 반면 바쇼는 꽃을 손대지 않고 눈여겨 살펴보기만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동양적, 서양적 사고로만 구분지을 수는 없고 오히려
인간중심 사고의 사회인지, 사물중심 사고의 사회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현대는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차지하는 관점의 자본주의가 대세입니다.
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정신영역의 황폐화와 물질만능의 사상이 인간을
지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이가 다 소유를 원하는만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저자의 말처럼 존재를 중요시 하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 완전히 물질적인 가치를 도외시
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소유의 욕망에만 사로잡혀서
정신적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인간 개개의 삶은 빈약하고 구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이 1976년 출간이 되었으니 40년이 흘렀습니다만, 저자가 통찰했던
사회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꽃을 즐기기 위해 꺾어서 가지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존재함을 바라봄으로 더 큰 만족과 가치를 얻을 수 있음을
생각해 보는 하루입니다.

편안한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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