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의 뒷자리

노동과 투쟁에 대한 기록

by Peeping

한창 소설만 읽던 내가 얼마 전 읽은 책은 희정의 『뒷자리』였다.
희정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작년이었다. 나의 독서 기록을 본 사람이라면 내가 대학원에서 도시의 권력 구조를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도시 속 권력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도시의 역사와 구조를 파헤쳤다. 나아가 도시를 하나의 무대로 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연극적 장면들—권력의 연출, 시민의 배역, 기억의 무대—을 분석했다. 그 과정에서 더 미시적인 단위로 시선을 돌려 공단의 노동과 그 인식,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문화적 산물을 살폈다. 구미공단 노동자들의 근무환경을 비롯해 노동자 문예대회나 근로문예상 같은 기록들(예: 「일어서는 강」 등)까지 추적했다.


이때 함께 떠올린 책이 송경동의 시집 『꿀잠』이다. 그는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를 쓰며 노동운동가이자 문화활동가로 살아왔다. 그의 시는 민중의 삶과 노동자의 체험을 생생히 증언하며,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구절 속에서 ‘노동이 문학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노동과 노동자, 그리고 그 의미

국어사전은 노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몸을 움직여 일을 함.

2.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곧 육체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은 노동을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한 방식으로 이해했다. 일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을 구분한다. 노동은 생명유지를 위한 반복적 행위이고, 작업은 인공적인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며, 행위는 정치적 자유의 표현이다. 그녀는 현대 사회가 노동 중심으로 기울며 인간 고유의 자유—행위의 가능성—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특히 희정은 『뒷자리』에서 노동자들의 노동과 더불어, 그들이 몸으로 표현한 자유의 형식인 투쟁—즉 한나 아렌트가 말한 ‘행위’—를 탐구했다. (그녀의 저서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표현은 아니다.)


희정 작가

책날개에 있는 그녀의 소개는 짧지만 강렬하다.

기록노동자.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한다.

그녀는 2010년부터 기록 활동을 시작했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에서부터 『노동자 쓰러지다』, 『일할 자격』, 『베테랑의 몸』, 『죽은 다음』, 그리고 이번에 읽은 『뒷자리』까지. 그녀의 책 제목들을 통해 노동, 투쟁, 그리고 삶의 흔적을 담는 그녀의 주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초기에는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삶을 구술했고, 이후에는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픈 몸, 일터, 그리고 사회적 침묵을 기록함과 더불어, 공분을 일으키기 위해 읽히는 글을 쓴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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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자리, 어떤 일을 한 뒤의 흔적


그녀의 작업 여럿을 다루고 싶지만, 오늘은 최근에 읽었던 <뒷자리>, 그중에서도 밀양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대목만 다루도록 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부. 여전히 남은 사람들


1. 송전탑이 세워져도 마을의 시간은 가고

밀양 송전탑 건설에 대한 반대 투쟁

2. 평화란 "아침까지 푹 잘 수 있는 것"

미공군 폭격장 철수를 위한 매향리 주민들의 투쟁

3. 방사능 피폭 위험지대에 들어오셨습니다.

경주 월성원전 철수를 위한 나이리 마을 사람들의 투쟁


2부. 우리 싸움은 누가 기억하지?

1. 우리가 구호를 외쳤잖아요.

롯데호텔 파업과 성희롱 집단 소송 사건

2. 통증에도 위계가 있어.

114 한국통신 안내원들의 근골격계 투쟁


3부. 들리지 않아도 목소리는 존재한다.

1. 봄이 올까요

2. 뿌리내리는 이들을 만나다.

3. 가장 늦게 잘리는 자, 경리


3부는 정치적 투쟁을 다루지는 않지만, 일터에서 ‘살아내는’ 이들의 삶을 통해 노동이 곧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며 나는 부끄러웠다. 이토록 많은 투쟁이 있었고, 모두 2000년대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많은 투쟁이 완전한 결실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송전탑은 결국 세워졌고, 매향리의 상처는 여전하며, 월성 인근에는 아직도 마을이 남아 있다.




거리에 세운 농성장이 아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싸움터가 된 이들은 어디로 가나. 그들의 투쟁 '이후'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나. 싸움이 시작되고 끝나는 자리에서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이들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이 마음에 남았다··· 나는 자신이 뿌리내린 곳에 국가 권력과 자본의 힘이 밀고 들어오는 일을 감당하며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감도 잡지 못한다. 그럼에도 '싸움이 끝난 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내게 늘 어떤 물음표였으므로, 그들의 흔적을 잠시라도 보고 싶었다. p.16-7


2005년, 한국전력은 경남 밀양 일대에 초고압 송전탑(765kV)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과 남부 지역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국가 기반사업이었다. 그러나 송전선이 지나갈 예정이던 마을의 주민들은 반발했다. 전자파 피해, 농지 훼손, 재산권 침해는 물론, 오랜 세월 이어온 마을의 질서와 삶의 방식이 무너질 것을 우려했다.


처음에는 정부와 주민 사이의 협의가 시도되었지만, 주민들의 반대는 점차 조직적인 저항으로 발전했다. 2012년, 산외면 보라마을의 고(故) 이치우 씨가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고 말하며 분신한 사건은 밀양 문제를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했다. 그 뒤로 마을의 노인들과 여성들이 송전탑 부지를 지키기 위해 몸으로 저항했고, 경찰과 한전 인력 수천 명이 투입되는 대치가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은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침식했다. 한전과 주민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구도는 점차 주민 간의 갈등으로 전이되었다.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과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 사이의 균열은 깊어졌다. 찬성 주민들은 보상금을 반대 주민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고, 뒤늦게 합의에 나선 이들에게는 송전탑 반대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가 요구되었다. 각서를 쓴 사람들은 찬성과 반대,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게 되었고, 공동체는 서서히 붕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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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갈등은 단지 행정과 주민의 충돌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신뢰가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외부의 압력이 안쪽으로 스며들면서 관계의 질서는 해체되었다. 한전과의 싸움은 결국 이웃끼리의 싸움으로 바뀌었고, 분쟁은 장기화되며 피로와 냉소를 낳았다.


국가는 이 싸움에서 끝내 소박한 삶들로부터 승리했다. 밀양은 국책사업의 의지를 천명하는 상징적 무대가 되었다. '전기는 산업의 피'라는 명제 아래, 주민들의 고통은 산업 발전의 불가피한 대가로 치부되었다. 이 논리는 오늘날의 재개발 논리와도 다르지 않다. 한 지역이 개발되면, 이전에 그곳을 지키려 했던 명분과 논거들은 무너진다. 결국 송전탑은 선로를 변경하는 일보다 지역민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일이 더 쉽다는 계산 속에서 세워졌다. 2014년, 공사는 경찰 병력이 동원된 행정대집행으로 강행되었고, 2015년, 밀양 송전선로는 결국 완공되어 가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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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 들어섰어도 밀양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왜냐면]_한겨레신문


이후에 다뤄지는 이야기들 역시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모두 살아가는 사람들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닿아 있다. 희정의 책은 우리가 직접 겪지 못한 싸움들을 차분히,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외면된 기억을 감정적으로 쏟아내지 않는다. 대신, 그 기억을 ‘기록’이라는 방식으로 조용히 되살린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녀의 글은 단순한 기록을 통한 전달이 아닌 기억을 보존하고 공감의 통로를 여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행위로써의 투쟁

행위는 인간의 다수성이 존재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며, 인간의 자유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만 드러난다.『인간의 조건』p.302

희정이 기록한 사람들은 바로 그 ‘행위’의 주체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몸으로 싸웠다. 그들의 투쟁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존재를 세계 속에 새기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희정의 『뒷자리』는 싸우고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밀양, 매향리, 월성, 롯데호텔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투쟁을 담담히 써 내려가며, 노동이 단순한 생계가 아닌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이 책은 사회문제를 다룬 르포이자, 잊힌 이들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기록문학이다.


그래서 『뒷자리』는 노동과 인간, 기억과 기록의 의미를 함께 사유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현실을 철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KakaoTalk_20251006_011343012_03.jpg 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작은 후회를 감수하며 사는 사람.


ps. 작가의 주제의식도 물론이거니와 그를 표현하는 문장력도 너무 좋아서 다른 책들도 계속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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