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일기
아이의 성장치료를 시작했다. 3개월에 1번씩 호르몬에 영향을 주는 주사를 맞는 치료다. 아이는 몇 시간에 걸쳐 피를 뽑고 다시 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의연했다. 주사기에 피가 쭉 빨려 나오는 피 뽑기는 처음 경험해 봐서인지 한편으로는 재밌었다는 표현까지 했다. 엄마로서는 다행이었다.
아이가 이걸 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물론 내 내면 안에서의 우여곡절이었지만. 나는 검사를 받아보는 것으로도 몇 달 고민을 하다가 결국 검사 예약을 했다가 취소를 했다가 겨울에 와서 다시 검사 예약을 잡았다. 놀이공원 갈래 말래처럼 아이의 대답에 따라 결정하면 좋으련만, 이 치료는 아이가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이에게 생각을 물어보지 않고 내 안에서만 고민을 했다.
그런데 이 성장치료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성장을 치료하는 것도 아니고 성장을 방법 삼아 치료하는 것도 아니니 언뜻 좀 이상한 이름이다 싶다. 하지만 뭘 하겠다는 건지 대강 의미가 와닿는다. 맞다. 아이의 성장속도를 조절하는 치료다. 일찍 사춘기가 와서 빨리 크기 시작하는 아이는 그만큼 또래에 비해 빨리 성장을 멈춘다. 그래서 천천히 오래도록 크기 위해 성장치료를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장치료는 성장 속도를 '늦추는' 치료가 된다. 언뜻 떠오르는 치료 개념과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크던, 어떤 어른이 되던, 그걸 부모인 내가 결정할 마음은 없었다. 아이는 아이의 운명의 손에 이끌려 성장하는 존재이고 부모는 지켜보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성장치료 같은 걸 아이에게 시키는 사람은 아이를 자기 소유물처럼 쥐고 흔드는 욕심 많은 부모라고 생각했었다. 아이가 커서 키가 작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키가 큰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건 아이의 운명인데 그것까지 부모가 통제하려 하다니. 적어도 아이의 '키'는 나에게 아이의 운명의 영역에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첫 생리를 언제 시작하냐는 운명 앞에서는 그게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보기에 아직 어린아이가 곧 생리를 시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가 몸만 성장해 피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내가 보는 나의 아이는 생리가 필요한 때가 되려면 아직 한참을 멀었거늘 벌써부터 이런다니. 그런데 성장치료를 받으면 성장속도를 늦추면서 이른 첫 생리도 늦추게 된다고 하니 성장치료는 부모의 욕심이 아니라 아이의 정신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치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기 초경은 조기 폐경을 부르고 조기 폐경 이후의 여성은 높은 여성암 위험성을 가진다는 자료도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그렇게 아이의 첫 생리 시기를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렇지만 성장치료를 고민하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여자아이들의 초경 연령은 과거에 비해 점점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한 연구 결과는 미국 여성들의 평균 초경 연령이 점점 빨라져 1950~1969년에 태어난 여성은 일반적으로 12.5세에 월경을 시작했지만, 2000년대 초반 출생자의 초경 연령은 평균 11.9세로 앞당겨졌고, 이런 추세는 전세계적이라고 발표했단다. 원인으로 추정되는 건 환경오염이라고 하지만 추정일 뿐이고 확실한 결론은 없다. 어쨌든 원인은 모르지만 여자아이들 초경이 빨라지는 건 보편적인 추세이다. 그렇다면 나의 아이가 곧 초경을 시작한다 해도 그건 이 시대의 아이의 운명일 뿐이고, 거기엔 아이의 잘못도, 부모인 나의 잘못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나보다 더 오래 미래를 살아갈 아이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균수명은 길어지는데 평균초경이 빨라지면, 아이는 그만큼 이른 가임기를 경험하고 오랜 폐경기를 감당해야 한다. 그런 데다가 아이가 사는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사회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들도 많다. 후세대의 사회적인 자립은 나의 세대의 자립보다 늦으면 늦었지 빨라지기 어렵다. 몸은 빨리 성장하고 자립은 늦어지게 될 나의 아이. 그리고 오래 살아갈 나의 아이. 나는 그렇게 뒤죽박죽된 아이의 삶을 가지런하게 정돈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하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고 아이의 오랜 건강과 복지를 위한 길이라고 믿으며, 결국 성장치료를 결심했다.
먼 미래의 아이는 지금의 부모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때 부모가 잘 판단해주어서 건강한 어른으로 살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부모가 호들갑을 떨었다고 생각할까. 그리고 나는 어떨까. 그때 그건 아이에게 필요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내 욕심이었다고 후회할까. 아이의 운명을 누가 알랴. 어쩌면 아이가 살아갈 시간이 길다고 믿는 것부터 나의 욕심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