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노교수

어제의 일기

by 교우

다시 벚꽃이 피었다. 다시 봄이 왔다. 자연의 위대함은 올 때가 되면 반드시 온다는 것이겠지.

인간도 그렇다. 누구나 반드시 언젠가는 죽는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생과 사 앞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생뚱맞게도 나의 대학시절 한 교수님이 생각난다. 나의 은사님이라 살갑게 부를 만큼 그분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다. 아마 나는 그의 수업을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고 그와 일대일로는 한마디도 나눠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인연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없는 사이였다.


법과대학의 교수는 대부분 자신의 저서로 강의를 한다. 그리고 법서는 어떤 사안에 대해 학계의 여러 설, 대법원의 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인 교수의 주장 이렇게 구성된다. 사안이야 차고 넘치니 책은 두껍고 쓸 말은 많지만, 자기 논리와 결론이 없는 법서는 없다. 그러니 그 자기 법서를 가지고 하는 법과대학의 강의도 온갖 사안에 대해 여러 학설, 그리고 판례, 마지막으로 교수의 논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임팩트도 없고, 끝도 없이 흐른다. 그러니 수업이 지루할 수밖에.


하물며 교수님은 목소리도 작고 높낮이도 없었다. 늘 온화한 인상에 온화한 말소리로 지루하게 강의를 하셨다. 사담, 농담 같은 것도 일절 섞지 않았다. 교수님은 그야말로 학자라는 직업에 딱 맞게 바르고 올곧은 모범생이었다. 얼마나 올곧은 분이셨는지, 당시에는 명의신탁(남의 이름을 빌려서 부동산을 매수하거나 보유하는 행위)된 부동산을 맡겨놨던 사람이 돌려달라 하면 명의 빌려준 사람은 언제든지 돌려줘야 하고 명의자가 마음대로 처분을 해버리면 오히려 형사처벌을 받던 시대였는데, 교수님 홀로 명의신탁은 무효이니 밖으로 드러난 이름이 실제 소유자이고 남에게 부동산을 맡겨 둔 사람은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다는 주장을 펼치셨다. 남의 이름을 빌려 마구 재산을 늘리고 세금을 포탈한 사람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대쪽 같은 선비 정신으로 말이다. 그땐 그 선비정신을 가진 교수가 그 교수님 혼자였다. 우린 그걸 '극소수설'이라 불렀다.


그렇게 숨통을 조이는 강의만 하시던 교수님께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은 무엇에 마음이 동하셨는지 수업에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셨다. 요지는, 꽃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강의실에 오는 길에 본 벚꽃도 화단에 피어있는 작은 꽃도 누가 심지 않은 잡초에서 핀 보일락 말락 한 꽃도 경이롭게 아름답고, 그건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해가 갈수록 더 귀하게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나는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꽃사랑 고백이 뜬금없다 느껴졌지만, 노인이 될수록 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기 생명력이 꺼져가니 생명력이 넘치는 꽃에게 끌리는 거라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교수님도 차곡차곡 자기 연세에 맞는 감성을 쌓아가고 계시는구나 싶어 교수님이 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캠퍼스를 쏘다니며 젊음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어느 날 캠퍼스로 가는 큰 길가 횡단보도 앞에서 다시 교수님과 마주쳤다. 교수님은 신호를 기다리는 학생들 틈에서 손에 쥔 작은 비닐봉지를 곁눈질로 살피시더니 상호가 프린트된 면을 몸 쪽으로 바짝 붙여 잡았다. 학생들에게 무슨 비닐봉지인지를 들키기 싫으시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봤다. 그건 약봉지였다. 아마 교수님은 캠퍼스 옆에 붙어 있는 대학병원에 들렀다 그 앞에 즐비한 약국에 들렀다가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시는 길이셨을 거였다. 그래도 약봉지 손에 들고 가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하셨을까. 살다가 늙고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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