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오늘까지 보내야 하는 프로그램을 간신히 마감하고 발송한 후,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오늘의 주종은 아드벡 10년과 하이네캔, 안주는 열무김치다. 비로소 내가 나답게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간, 이런 시간조차 오랜만인 느낌이다.
일이라는 게, 절대 사람 사정 따져가며 찾아오진 않는다. 오늘까지 발송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꽤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주문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물론, 지금 주문이 많기 때문에 도무지 못하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몇 번 그렇게 거절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귀신같이 할 일이 없는 시간이 나를 찾아왔다. 일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데 일이 없는 시간의 공허함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오늘은 바쁜 와중에도 PT 받으러 가는 날이라서 아침부터 밀려든 수정건을 처리하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헬스장에 도착했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내 얼굴 보자마자 '오늘도 일이 많으셨나 봐요?'라고 묻는다. 나는 '그러게요, 일 좀 덜했으면 좋겠네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일이 많은 게 없는 것보단 낫죠. 힘내세요'라는 답을 받았다. 운동 말고도 배울 것이 참 많은 사람이다. 저 나이 때, 그러니까 10년 전에는 나도 저렇게 열정적인 사람이었을까.
PT 받은 지는 벌써 6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한 가지 운동을 이렇게 오래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이 운동이 나와 잘 맞는 모양이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단순히 건강을 위해서, 또는 다이어트를 위해서 시작한 운동이지만, 점점 더 무거운 걸 들어보고 싶고, 더 멋진 자세로 운동하고 싶어 진다. 물론 무게를 조금씩 높일 때마다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이 찾아오고는 한다.
어찌 보면 지금 하는 일도 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 욕심내지 않고, 쉬운 건들 위주로 많은 주문을 받지 않으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내는 매일같이 욕심 좀 그만 내라고 잔소리를 한다. 적당히 쉬는 시간도 만들고, 힘에 부칠 것 같으면 주문을 더 받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고. 그 말이 옳다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또 주문이 들어오고, 내가 할만한 일이구나 싶으면 그만 또 수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과학 시간에 배웠던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생각났다. 큰 힘을 가하면 반드시 그 힘에 대항하는 힘이 돌아온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느끼는 고통은, 열정의 반작용일지도 모르겠다. 욕심이 생겨서 더 무거운 걸 들게 되면 그만큼 고통을 느끼듯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고통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내 욕망이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내 일이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것 이외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