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초기 벤처투자가로서의 고민
나름대로 많은 스타트업들과 일을 하면서 성공적으로 성장하는 스타트업과, 그렇지 못한 스타트업을 접하고 있다. 이 둘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하는 마법의 공식 같은 것은 당연히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경향성은 있는 것 같다. 주말 아침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성공적인 창업가는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몇 가지 메모해본다.
가설과 실험의 중요성을 안다. 스타트업은 기본적으로 시장과 고객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이다. PMF를 찾기 위해서 '인사이트'나 '감'에 기반한 사업이 아닌, 가설 기반의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나간다. 가설-실험-검증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사업 계획과 주요 의사 결정을 이런 가설-실험-검증 과정을 반복하면서 진행한다.
가설과 실험에 있어, 정성적이 아니라 정량적으로, 또한 구조적으로 사고한다. 데이터의 중요성을 안다. 예를 들어, AARRR과 LTV/CAC 와 같은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핵심 지표의 의미와 추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또한, 반대로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의미 없는 허수 지표 역시도 파악하고 있다. 상대방을 설득할 때에도 (예를 들어, 투자유치를 할 때) 정량적인 지표에 기반하여 설득한다.
시장과 고객의 중요성을 안다. 중요한 것은 창업가 본인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고객이 원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인지하고, 그 중요성을 알고 있다. 너무 기본적인 내용이어서, 다들 안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 안하는/못하는 창업자가 적지 않다. (즉, 고객은 외면한 채 그냥 창업자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객, 고객, 고객!
실행이 빠르다. 의심할 여지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팀은 시장에서 피드백을 받거나, 우리 같은 자문이 피드백을 주면 그 즉시 반영하지만, 또 어떤 팀은 수개월, 심지어 수년이 지나도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하지만 이유, 상황, 문제를 막론하고 빠르게 실행하지 못하면 그 팀은 결국 실패한다.
사업가로서 성장하고 진화한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계속 도메인 전문가로 남으면 안 되고, 결국 '사업가'로 진화해야 한다. 사업은 대표가 성장하는 만큼 성장한다. 그냥 전문가로만 머물러 있으면 결국 사업은 성장하지 못한다. 특히 스타트업의 그릇은 대표의 그릇과 같이 성장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전문가' 출신의 창업가들이 이 덫에 갇히고 만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귀담아듣는다.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를 해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나, 자신의 고집에 갇혀서 귀를 닫고 다른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조언이 정말 중요한지, 쓸모없는 이야기인지 구분하는 것인데, 역시 이것도 창업자 본인 역량의 일부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너무 휘둘리는 '팔랑귀'가 되어서도 안되지만, 사실 창업을 할 정도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팔랑귀는 의외로 별로 없다.)
투자자를 잘 레버리지 한다. 투자자는 같은 배를 탄 주주로서 완전한 우군이다. 특히 우리와 같은 초기 투자사들은 더욱 그러하다. 사업을 잘하는 창업가는 투자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투자자의 전문성, 네트워크, 자본력 등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투자자는 숙제를 검사받아야 하는 대상도 아니고, 잘 보여야 하는 갑을 관계도 아니다. (잊지 말자. 잘 보여야 하는 대상은 고객이다.) 사업을 잘하는 창업자들은 투자자를 사업을 함께 만들어가고,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로 인식한다. 사업이 잘 안되면 갈수록 투자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숨으려는 창업가들이 있다. 오히려 반대로 해야 한다. 더 적극적으로 투자사와 소통하고 레버리지를 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 커뮤니케이션을 효율적, 효과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며, 커뮤니케이션 대상은 투자자, 공동창업자, 사내 직원들, 그리고 시장을 모두 포함한다. 특히 너무 '늦게' 커뮤니케이션해서 문제 해결의 타이밍을 놓치거나,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을 못하는 경우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오픈해놓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사실은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야기한다든지) 정말 답답해진다. 반대로, 매달 (혹은 특정 주기로) 투자자에게 최근 진행 상황과 지표를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전달하는 소수의 팀이 있다. 필자의 경험상 이런 팀은 대개 성공적이었다.
메타인지. 창업자 본인에 대해서, 그리고 팀에 대해서 정확히 스스로 파악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역량, 특징들을 실제로 내가 얼마나 어떻게 갖추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어떻게 보완할지도 알고 있다. 즉, 내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안다. 잘 풀리지 않는 팀을 보면, 스스로에 대해서 3자가 바라보는 평가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통은 스스로를 더 과대평가한다.) 모든 발전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인지와 상황 인식에서 시작한다.
성장의 중요성을 안다. 결국 스타트업은 '스타트' 해서 '업' 해야 한다. 성장하지 않으면 스타트업이 아니다. 그냥 개인사업이나 중소기업의 가장 큰 차이는 결국 스타트업은 "성장"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정량적 사고, 가설/실험, 실행력, 커뮤니케이션, 메타인지 등 모든 것들이 결국 '성장'을 위한 것이다. 성장 자체는 느릴 수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사업을 단순히 '지속 가능하게'만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근본적으로 스타트업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투자자로서의 역량은 위에서 언급한 조건을 갖춘, 혹은 (시드 펀딩에 집중하는 초기 투자자로서 더 정확하게는) 이러한 조건을 앞으로 '갖출' 잠재력을 가진 창업가들을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예술의 영역이고, 투자를 실제로 집행해서 피를 섞고 일을 함께 해보지 않으면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 내부에서 함께 일을 해보면 너무도 명확하게 보이지만, 외부에서는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분명 존재한다.
이것이 초기 투자자로서의 근본적인 어려움이자 한계이고, 투자 전략 역시 이런 딜레마를 충분히 반영하여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