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만 읽은 자의 깨달음
어릴 때부터 책을 집는 습관이 있었다. 손에 잡히는대로.. 궁금한대로.. 펼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가 도서관에 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50분을 가야하는 길이었는데, 한 번 같이 간 후에는 혼자서 매주 도서관을 갔다.
주말만 되면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서 오픈 시간부터 오후 5시에 나가야 할 때까지 하루종일 도서관에 있었다. 도서관이 좋았다.
그런데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책을 좋아한게 아니었던 것 같다는 걸..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뿐.
궁금한 부분을 알고 싶었던 것 뿐.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대체 무얼 읽은걸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글자만 읽었나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식은 조금이나마 채웠다는 것.
걸음마를 다시 시작하는 것 같다.
최근에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으며
또 독서모임으로 인해 <바깥은 여름>, <책 먹는 법>, <독서모임 꾸리는 법>을 읽으며
'나의 독서'는 글자만 읽는 행위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30년이 더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는 게 참 충격적이지만 기죽지 않았다!)
작가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 이 출판사에서는 이런 책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된 반가움, 북클럽을 해보고 싶은 마음, 읽지 않던 장르와 모르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또 <그런 책은 없는데요...>, <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 <아무튼, 문구>를 읽으며 책에 대한 재미도 다시 이끌어 올렸고, <도서관 여행하는 법>을 읽으며 도서관 덕후로써 함께 고민하는 것도 배우기 시작했다.
예전이었다면..
걸음마를 다시 시작하는 이 기분이 절망적이었을 것 같다.
(나의 부정적인 기운이라면 충분히 그랬을거다.)
그러나 실제로 20대 중반이 되어서 걸음마부터 다시 해본 경험이 있는 나!
알고 있다. 0이 된다고 해도 곧 1이 된다는 것을.
겨우 한 발자국 떼어가는 걸음마일지라도 곧 걸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자유로이 걸을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즐기면서 책과 친해져보려한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잘 부탁해..라고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