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랑의 고백 뒤에 따르는 이별이란 책임
첫사랑 영상에 모습을 비춘 승우의 모습은 순백색이었다. 그리고 승우가 다혜를 만나 물들어 갈수록 승우는 자신의 색을 잃어갔다.
첫사랑인 승우에게 단 한 번도 이별 사자가 다녀가지 않았던 탓에 이별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승우는 자신이 어디까지 다혜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다혜만 옆에 있다면 자신이 어떠한 색을 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혜의 색이 곧 자신의 색이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승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선을 훌쩍 넘고 말았다.
승우는 사랑에 취해 감정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흘러가다 때론 고유한 색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승우에게 사랑이란 불멸의 존재와도 같았기에 이와 같은 이별 사자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아쉽게도 승우의 믿음과 달리 영원할 것 같은 사랑에는 언제나 끝이 있다. 이것이 우리 이별 사자의 존재에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초보이지만 사랑의 깊이만큼은 가장 깊은 것이 첫사랑이다. 그리고 그 깊이만큼 아픈 것 또한 첫사랑의 이별이다. 난 승우에게 다가올 감당하기 어려운 이별에 아픔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승우의 첫사랑이 그 누구보다 깊었음을 느낄 수 있기에...
물론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이 항상 핑크빛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승우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동굴 속으로 들어갈 때면 다혜는 동굴 밖에서 아무 말 없이 승우를 기다려 주었고 다혜가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날이면 승우는 다혜를 꼭 안아주 듯 곁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보폭을 맞추고 기다려주며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지금까지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 다소 승우의 사랑이 깊기는 했지만 다른 인간에 비해 아주 특이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면 영상 중간중간이 훼손되어 이야기가 끊긴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야기에 쉽게 몰입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었다.
[신입 이별 사자] : 선배님. 필름이 오래되어서 그런지 중간중간에 영상이 날아간 거 같은데요?
[이별 사자] : 아닐 거예요. 제 생각에는 승우가 중간중간 손을 덴 거 같아요.
[신입 이별 사자] : 인간이요?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요?
[이별 사자] : 생명에 위협이 갈 정도의 고통을 받으면 인간들도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곤 하죠. 승우는 우리가 보지 못한 몇몇 기억에 그 정도에 고통을 받았나 보네요.
우리의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사기의 영상은 계속 흘러갔다. 영상이 끝날 무렵에는 승우의 필름이 중간에 파손되어 있었던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고 결국 다혜는 한 장의 편지와 함께 승우의 곁을 떠났다.
[다혜] : (편지/눈물 자국) 승우야.. 미안해. 우리 여기까지 인가 봐.... (생략)
[다혜] : 그리고 나 한국 떠나. 이 편지를 네가 볼 때쯤이면 이미 난 한국에 없을 거야. 그러니 나 찾을 생각 하지 말고 빨리 잊어주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더 좋은 사람 만나....
그렇게 다혜는 승우의 세상에서 잊히길 바랬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이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이다. 승우는 눈물자국에 얼룩진 편지 너머로 며칠 전 다혜의 집 앞에서 보았던 작고 아담한 사랑스러운 다혜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달려가 꼭 끌어안을지 말지 몇 번을 고민하던 끝에 다음을 기약하고 말았던 그때의 자신을 하염없이 원망스러워했다. 그것이 승우가 볼 수 있었던 다혜의 마지막 모습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성큼 다가온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승우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다혜가 남기고 간 이별이란 숙제가 처음 이별 앞에 선 승우에게는 다소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느끼는 고통에 승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별 사자] : 담당 이별 사자가 어떤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너무했네요. 한 번쯤은 승우에게 넌지시 알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승우의 애정 주식은 매일같이 상한가를 기록하다.. 하룻밤 사이에 폭락에 이어 부도가 나버린 꼴이었다. 분명 그 시절 담당 이별 사자는 애정 주식에 폭락 징후를 미리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보를 당사자인 승우에게는 전혀 알려주지 않은 듯했다.
[신입 이별 사자] : 으... 충격이 어마 어마 하겠는데요?
[이별 사자] : 가장 높은 곳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어 떨어졌으니... 아마 후배님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첫사랑에 담당 이별 사자는 간혹 인간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꼰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이별 앞에 무방비한 상태로 내던져 버리곤 한다. 첫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이별 사자의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승우가 오래전에 만났던 이별 사자는 배려가 넘치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승우의 눈에 비친 세상은 눈물에 젖어 한동안 얼룩 져 있었다. 다혜와 함께 거닐었던 수많은 공간을 혼자 걸을 때면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수많은 이별 노래와 공감하고 슬픈 영화 속 주인공에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였건만 승우의 이별 상처에 깊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져만 갔다.
영상 속 승우는 매일같이 더 이상 곁에 다혜가 없다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이 온 세상을 삼키고 나면 곧 터져버릴 것 같은 슬픈 눈으로 자기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하루를 마무리짓곤 했다. 슬픔의 쳇바퀴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굴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저녁 시간이었다. 승우는 작은 마을 정류장에 앉아 그녀의 동네로 향하는 75번 버스를 수차례 멈춰 세웠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승우를 태우기 위해 문을 열 때면 승우는 고개를 떨구며 기사 아저씨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떠나가는 버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더 이상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승우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막차가 지나가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승우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집으로 오는 길 띄엄띄엄 자리 잡은 가로등 불빛은 오로지 승우만을 위한 것이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어두운 밤이 만들어낸 적막함에 더욱 뚜렷하게 들려오는 빗소리 사이를 승우는 초점을 잃은 상태로 하염없이 걸었다. 승우의 육체는 현실에 머물고 있지만 영혼은 과거의 시간에 갇혀 있는 듯 보였다. 현실의 육체와 과거의 영혼이 만나는 끝자락에 승우는 펑펑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별의 상처가 아물고 있는 과정이었다. 이런 승우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는 듯 때마침 빗줄기는 더욱 굵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담당 이별 사자의 작은 배려였을 것이다. 굵은 빗줄기들은 눈물로 범벅이 된 승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슬픈 기억과 빗줄기는 금세 하나가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쏟아지듯 내리는 빗줄기는 승우의 슬픔을 씻어 내리고 있는 듯했다.
멀어지는 승우의 뒷모습을 뒤로 한채 승우의 마음을 대변하듯 흘러나오는 노래는 임재범의 '고해'였다.
[신입 이별 사자] : 이 노래 너무 슬픈데... 좋네요. 이 상황과 너무 잘 어울려요.
[이별 사자] : 아마 이 일을 계속하게 된다면 수없이 듣게 될 노래지요. 몇 년 뒤에도 이 노래를 변함없이 좋아하게 될지 궁금하네요.
[신입 이별 사자] : 이 노래가 그렇게 유명한 곡인가요?
[이별 사자] : 특히 인간 남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하죠. 너무나 유명해서 인간 남자들이 틈만 나면 노래방이라는 곳에서 부르는 노래예요. 덕분에 인간 여자들이 질려 버린 노래이기도 하죠.
그 일이 있고 크게 요동치던 승우의 삶은 다혜를 만나기 전 그 시절처럼 잔잔한 평온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평온함은 승우 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다혜의 오랜 친구로부터 다혜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잠시 잊혔던 슬픈 기억들이 모습을 내밀자 승우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혜는 승우의 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일주를 떠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스페인에 작은 도시 론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혜가 스페인으로 향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 승우는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하지만 스페인에 도착하면 쉽게 다혜를 마주 할 수 있을 것 같은 승우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승우가 찾은 것은 다혜가 남기고 간 흔적들 뿐이었다. 승우의 발걸음은 항상 다혜보다 한걸음 늦었다. 승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혜가 머물렀던 숙소와 사람들로부터 다혜의 소식을 듣고 머릿속으로 그리는 것뿐이었다. 그 이후로 다혜는 승우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혜는 승우가 자신의 뒤를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자신의 행적을 철저히 숨겼다. 그렇게 다혜를 향한 승우의 여정은 끝을 향해 나아갔다.
승우는 다혜가 없는 한국의 평범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슬픔에 잠겨 있거나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승우의 바쁜 삶에는 더 이상 다혜의 옛 기억이 맴돌 자리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승우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다. 세계 모든 나라를 손쉽게 다닐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영상 속에는 왜 그가 이 직업을 선택했는지 명확히 알려주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디를 바라보며 그 직업을 선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승우는 이렇게 사랑과 이별은 아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또한 마음속 깊이 새겼다.
[신입 이별 사자] : 이제야 남자아이가 슬픔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네요.
[이별 사자] : 이별 삼우제라고 들어봤죠? 인간 세상에서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을 뜻하곤 하는데 하나의 사랑에 기억을 추억으로 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죠. 승우는 이별 삼우제를 조금은 오랜 시간 동안 지낸 거 같네요.
[신입 이별 사자] : 이별 삼우제가 끝나면 어떻게 되나요?
[이별 사자] : 이별 삼우제가 끝나면 이별 사자들이 사랑의 기억을 시간의 모래로 덮는 작업을 해요. 그렇게 사랑의 기억과 이별의 아픔은 점점 무뎌지고 멀어지게 되죠.
[신입 이별 사자] : 그러면 사랑의 기억은 이대로 소멸되는 건가요?
[이별 사자] : 사랑의 기억은 절대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아요. 그저 우리가 뿌려놓은 시간의 모래에 덮여 인간들이 쉽게 떠올리지 못할 뿐이에요. 그래서 슬픔이 녹아든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에 모래가 씻겨 내려가 인간들은 옛사랑의 흔적들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되죠.
승우의 첫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명확한 감정의 끝맺음 없이 끝이나 버렸다.
[세희] : 승우 오빠 ~ 여기야~
영상이 끝무렵을 지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승우를 애타게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별 사자] : 타이밍 한번 죽이네. 얼른 준비해요. 이제부터 아주 바빠질 거예요.
'승우의 아픔을 덮은 두 번째 사랑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은 어떤 아이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