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사자] 이상형이란 밑그림 위에 맞춰진 인연

6화, 이상형이란 밑그림 위에 맞춰진 인연들

by 심스틸러

승우의 첫사랑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듯했다. 승우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던 힘찬 빛줄기는 몇 차례 흔들리더니 머지않아 스크린을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스크린을 넘어 극장을 가득 채운 어둠은 단순한 검은색이라 말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승우가 다혜를 처음 만나며 가졌던 풋풋했던 노란 기억, 처음 손을 잡으며 느꼈던 발그레한 붉은 기억, 서로 마주하며 미소 지었던 핑크빛 기억까지...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는 검은색 속에는 다양한 색의 추억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흐트러진 감정을 추스를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이 잠시 주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을 깨고 흘러나오는 잔잔한 노래와 함께 클로징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Cast]

남자 주인공 : 승우

여자 주인공 : 다혜

친구 1 :...

친구 2 :...

동네 깡패 :...

길고양이 :...

.

.

편집 : 이별 사자

노래 : 이별 사자


[이별 사자] : 유치하네요. 굳이 여기까지 자기 이름을 남겨야 했을까 싶네요.


[신입 이별 사자] : 정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분이었나 봅니다.


극장 밖에서는 낯선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세희] : (바깥세상에서 들리는 소리) 오빠 왜 이리 늦었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귀여움이 흐르는 것을 넘어 범람하고 있는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코에서 나온 소리는 나의 손을 자연스럽게 말아 쥐게 만들었다.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신입 이별 사자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이미 녹아 버린 것 같아 보였다.


[이별 사자] : (애교 섞인 목소리에 꼬여버린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씩 펴며 다양한 서류들을 허겁지겁 챙긴다.) 벌써 승우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나 보네요. 정신 차리고 이제 나가죠.


[신입 이별 사자] : 넵! 선배님. 그런데 이 가늘어진 소리는 뭐죠? 진정 인간의 소리인가요?


[이별 사자] : 사랑에 빠진 여자 인간의 목소리죠. 큐피드의 디퓨저에 부작용이기도 해요.


고개를 돌려 크로징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시발점인 영사기를 바라보았다. 아직 분주히 돌아가는 영사기는 이상하게도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별 사자] : 쿠키 영상 같은 건 없겠죠?? 늦었다가는 상대방 이별 사자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일단 먼저 나가죠.


[신입 이별 사자] : (이별 사자의 뒤를 따르며) 요즘 쿠키 영상은 꼭 봐줘야 하는데...


구시렁거리는 신입 이별 사자의 말을 가볍게 외면한 채 극장 문을 나서는 찰나였다. 문틈 사이로 작은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영사기는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가 자리를 비운지도 모른 채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듯했다.


[신입 이별 사자] : 무슨 소리지?? 우는 소리인가...? 선배님 무슨 소리 안 들리세요?


[이별 사자] : 무슨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발목을 부여잡는 찝찝한 소리였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도 모르는 상대방 이별 사자의 화가 난 모습을 떠올리자. '촉'이라는 녀석의 유혹을 강하게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별 사자]: '전 담당 이별 사자의 장난일 거예요. 별거 아닐 거니 신경 쓰지 말아요.


[신입 이별 사자] : 선배님 제가 한번 확인해 보고 올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다음 편 예고가 나오거나 아니면 여자 주인공 행방에 대한 힌트가 나올지도.


[이별 사자] : 분명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괜한 짓 하지 말고 얼른 서둘러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자신감 가득 찬 목소리로 신입 이별 사자에게 이야기는 했지만 마지막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소리가 신경 쓰이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솔한 나의 판단이 훗날 좋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다시 찾아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곤 하지만 나의 작은 선택으로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번만큼은 예외이길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었다. 사랑 극장을 빠져나오자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승우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내가 만났던 승우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사랑이 가득한 미소였다. 하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승우의 행복한 표정이 나는 더욱 걱정스러웠다. 승우의 사랑스러운 미소와 눈빛 뒤에 숨어있는 깊은 아픔의 그림자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말이다. 승우의 사랑스러운 시선 끝에는 새로운 사랑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이 서 있는 듯했다. 승우의 계절은 봄이었다. 얼음이 녹고 꽃이 피는 계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나의 주위를 맴도는 이 한기는 무엇일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에너지가 나를 부르는 듯했다.


[(여자) 이별 사자] : 3초 늦었어요....


차갑고 날이 제대로 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베일 것 같은 위협적인 목소리에 한층 작아진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찰랑이는 하얀 머릿결에 새하얀 피부, 목소리만큼이나 날카로운 눈매에 매력적인 빨간 입술에 지금껏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여자 이별 사자였다.


[이별 사자] : (여자 이별 사자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여자) 이별 사자] : 3초나 늦었으면서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미안하다던지... 왜 늦었는지 변명부터 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요??


[이별 사자] : 아... 저. 큐피드가 늦게 인수인계를 하는 바람에... 마지막 자료 검토가 늦어져서 조금 늦었네요. 예상치 못한 작은 혹도 달게 되었고 말이죠.


[신입 이별 사자] : (어리숙한 표정으로) 혹? 저요?


[(여자) 이별 사자] : 하여간 큐피드들이 항상 문제 긴하죠. 그런데 옆에 있는 저분은 누구예요? 한 사람에게 두 명의 이별 사자가 있다는 건.... 이 남자...


[이별 사자] :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이번에 교육 과정이 바뀌어서 현장 실습 중인 교육생이에요. 멘토와 함께하는 뭐라나...


[(여자) 이별 사자] : 아! 전해 듣긴 했어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귀찮게 항상 데리고 다녀야 하나 보네요. 아무튼 두 분 다 잘 부탁해요.


[이별 사자] : 잘 부탁드립니다.


[신입 이별 사자] : 넵!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여자) 이별 사자] :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 최선일 수도 있어요.^^


[(여자) 이별 사자] : 멘토까지 하시는 것 보면 경력이 꽤나 되시는 것 같은데. 시시콜콜한 일반적인 내용들은 문서로 공유하고 특별한 내용들만 간략하게 공유하는 건 어때요?


[이별 사자] : 네 그러게 하시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여자 아이 이름이 뭐죠?


[(여자) 이별 사자] : 세희예요. 안세희. 세희는 특별한 내용은 없어요. 배고프면 조금 다른 사람같이 변하긴 하는데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에요. 이건 뭐 대부분 여자 인간들의 특징이기도 하니 큰 문제는 안될 거예요. 그리고 조금 다른 아이들보다 예민하고 까칠하고 뭐 이 정도예요. 가장 중요한 건 승우를 향한 세희의 마음이 아직은 모두 열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마 세희의 마음을 모두 얻기 위해선 남자아이의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긴 하네요. 쉬운 아이는 아니인 거 같아서 말씀드리네요.


예민하고 까칠하다라... 세희는 자신의 담당 이별 사자와 참으로 닮은 듯했다. 이별 사자와 담당 인간의 성향이 서로 닮았기에 만나게 된 것인지 함께 생활하며 닮아가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오랫동안 풀지 못한 나의 숙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별 사자] : 아 그렇군요. 세희란 여자아이 참 좋... 은... 아... 이 일거 같네요. 남자아이 이름은 승우예요. 승우도 모난 구석 없이 착한 아이예요. 착한 것이 단점이라고 한다면 가장 큰 단점이죠. 그 외엔 크게 걱정하실 내용은 없어요.


[(여자) 이별 사자] : 그래요? 음.. 있을 거 같이 생겼던데. 과거 사랑 이력은 특이사항 없어요? 사연이 많은 얼굴인데.


이상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듯한 말투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승우의 옛사랑 이야기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원인인지는 모르나 마치 이미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듯 진실을 캐뭍는 듯한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별 사자] : 음... 확인해 보니 큰 문제는 없었어요. 첫사랑을 오랫동안 만난 거 이외에는.. 문서에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세요.


[신입 이별 사자] :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선배님.... 저 다혜 씨 이야기는?


[(여자) 이별 사자] : 다혜 씨???


[이별 사자] : (서둘러 말을 가로채며) 승우 첫사랑 여자 친구 이름이에요. 사랑 극장에서 막 나오는 길이라 후배님이 아직 이별 이야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나 보네요. 아직 자기가 남자 주인공인 줄 알고 아까부터 계속 저 이름만 중얼중얼거려요. 흔한 첫사랑 이야기였으니 크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나도 모르게 승우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숨기고 말았다. 목젖까지 올라왔던 승우의 깊은 상처가 담긴 이야기는 결국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사랑 앞에 온전한 진실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 이별 사자] : 인간들의 사랑 이야기를 처음 보면 그럴 수 있죠. 충분히 이해해요. 작은 이별의 아픔도 크게 느껴지고 마치 내가 이별을 한 것처럼 한동안 우울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 감정을 너무 길게 끌어 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에요. 후배님!! (승우의 문서를 가볍게 흔들며)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숨기거나 거짓된 내용은 물론 없겠죠?


툭 내던져진 마지막 한마디가 그리 가벼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냥 떠보는 것인가. 아님 정말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건가. 나의 동공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별 사자] : (조금은 상기된 듯한 목소리로) 물론 없죠. 지금까지 파악한 정보들 모두 빠짐없이 작성했습니다. 정보를 왜곡한다거나 숨기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괜한 걱정은 접어두시죠. 특별한 사항이 발견되면 바로 공유드리도록 하죠. (성급히 화재를 돌리며) 더 하실 이야기 없으시면 승우랑 세희에게로 이동하시죠. 첫 만남의 행동 패턴도 이제 관찰해야죠?


[신입 이별 사자] : (이별 사자의 눈치를 한번 본 후) 드디어 본격적으로 커플 관찰을 시작하는 건가요? 벌써 설레네요. 얼른 가시죠. 선배님들.


눈치 빠른 신입 이별 사자가 자연스럽게 나의 말을 거들어준 덕분에 상대 이별 사자도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재빨리 부자연스럽게 굳어버린 앞면 근육을 숨겼고 신입 이별 사자의 열정에 못 이기는 척 이끌려 승우와 세희가 있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승우는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리고 승우 너머로 보이는 세희라는 여자 아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별 사자]: (놀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 듯) 다혜? 그래 어쩐지 영상 속 여자가 처음부터 낯설지만은 않았어.


[신입 이별 사자] : 선배님. 왜 그렇게 놀라세요? 업!! 이거 뭐야!!


[이별 사자] : 후배님. 너무 티 내지 마요. 나중에 천천히 알아봅시다.


[신입 이별 사자] : 아무리 그래도 다혜 씨랑...


놀랍게도 세희는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다혜와 너무나 닮은 아이였다. 승우는 지금 다혜를 보고 웃는 것일까? 세희를 보고 웃는 것일까?


[(여자) 이별 사자] : 후배님. 또 다혜. 이제 그만해요. 웃기지도 않으니.


다행히도 여자 이별 사자는 우리들의 이상한 대화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넘겨 버렸다. 다혜와 너무나도 닮은 세희라는 여자 아이 너머로 인수인계를 하며 실적만 운운하던 큐피드의 썩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별 사자] : (혼자 말) 큐피드 녀석들 이건 너무 했잖아.


요즘 들어 유독 변질된 큐피드 집단들이 게으르고 실적에만 눈이 먼 나머지 보다 쉽게 사랑을 맺어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과거의 인연들의 몽타주를 그려 돌려가며 닮은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것은 여러 번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배려 없이 막무가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적어도 승우의 과거에 아픔을 한 번이라도 떠올렸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심장이 얼어있는 나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수많은 사랑을 경험해 온 그들이 몰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른 척한 것이다. 문득 인간들에게 사랑은 이별보다 더 감성적인 행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성은 이성보다 무모하고 단순하고 때로는 비겁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저 자신의 미래만 그리며 타인의 미래는 보지도 않는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들이 요즘 인간들이 하는 사랑과 닮은 것도 같아 아쉬울 뿐이었다.


이 사랑 이야기의 결말이 왠지 어둡게 그려진다.


{이별 사자의 얼어있는 심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작은 물방울 하나가 맺혔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형이라는 거... 어쩌면 큐피드의 게으름이 만들어낸 몽타주일지도 몰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별 사자] 사랑의 고백 뒤에 따르는 이별이란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