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사자] 이별도 오래전엔 아름답게 반짝였답니다.

8화, 이별도 오래전엔 아름답게 반짝였답니다.

by 심스틸러


첫 데이트 이후 승우와 세희는 몇 차례의 짧은 만남을 더 가졌다.


[승우]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들어가야지? 너무 늦었어.


[세희] : 시간 너무 빨리 간다. 오빠랑 있으면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


[승우] : 내 매력은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지.


[세희] : 뭐야! 귀엽게. 맞아 시공간을 초월해 그래서 항상 보고 싶고 어디에서든 생각나나 봐.


[승우] : 네가 더 귀여워. 난 매력적인 거라고.


[세희] : 알았어. 매력 인정할게. 내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까?


[승우] : 나도 너무 그러고 싶지만 정류장에서 집까지 너무 어두워서 안돼.

먼저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나도 갈게.


[세희] : 응 알았어. 오빠도 집에 조심히 들어가. 연락해 ^^.


[신입 이별 사자] : 어휴! 드디어 끝났네. 선배님 이거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세희 집 주변을 10바퀴나 돌았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별 사자] : 후배님 이 정도는 양반이라고요. 난 지난번에 동네 지도를 새로 그릴 뻔했어요.

내 전생에 김정호였나 했지.


[신입 이별 사자] :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십니까. 다리가 이미 제 다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여자 이별 사자 선배님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세희 집 앞에 앉아서 한 바퀴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별 사자] : 그러게 말입니다. 요 근래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 책을 읽었다나 뭐라나. 신경 끕시다. 말해봐야 입만 아파요.


[(여자) 이별 사자] : (이별 사자들에게 다가오며) 이제야 기나긴 굿바이 마라톤이 끝났네요. 고생했어요 ~ 다들. 커플 대화록은 나중에 공유해줘요. 그럼 이만 좋은 밤 되시고.


그렇게 상대 이별 사자는 세희를 뒤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이별 사자] : 후배님. 옳고 그름은 판단할 수 있죠? 좋은 것만 담아 가세요. 더 이상 말하진 않겠습니다.


[신입 이별 사자] : 네... 그럼요. 선배님 저희도 이제 돌아가시죠?


[이별 사자] : 걸을 수 있겠어요? 빠른 시간 내에 전동 휠이라도 빌려서 다닙시다.


만남의 횟수가 더해 갈수록 두 사람은 헤어짐의 순간에 서로를 가장 그리워하며 함께 할 시간에 항상 목말라했다. 공허함과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던 세희의 텅 빈 마음은 승우라는 존재로 조금씩 차오르는 듯했다. 승우가 곁에 있는 동안 세희의 외로운 감정 세포는 그렇게 점점 사라져 갔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들이 만든 사랑의 중력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서로가 손 내밀면 언제든 닿을 곳에 머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속도감이 우리 이별 사자들에게는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다. 사랑에 있어 넘치는 것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변수를 가져온 하니까 말이다.


굴곡 없는 사랑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듯 매번 상승 곡선만을 그리던 기세 등등한 승우의 사랑 주식 그래프에도 주춤하는 순간은 찾아왔다. 승우는 자신이 소속한 항공사가 짜준 스케줄에 세희의 곁을 잠시 떠나 파리로 가야만 했다. 동시에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인간들이 넘어야 하는 흔한 관문 중 하나였다.


<승우가 떠나는 날 (공항)>


[승우] : 이번 비행 일정 그렇게 길지 않으니까 금방 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세희] : 그 며칠이 나한테는 몇 년 같을 거야. 멀리 간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이상해.


[승우] : 정말 금방이야. 언제 갔었나? 싶을걸? 나 없는 동안 너무 즐겁게나 보내지 마세요~.

그나저나 나 이번에 파리 가는데 뭐 필요한 거 있어??


[세희] : 치! 그렇지 않다고. 오빠는 아직 날 몰라. 난 샤넬 같은 오빠면 충분해. 얼른 오시기나 하세요.


[승우] : 알았어. 나 없는 동안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다녀와서 확인할 거야. 얼마나 살쪘는지.


[세희] : 어휴. 이제 관리해야 돼. 오빠 만나고 2킬로는 쪘다고.

비행하면서 이쁜 승무원들한테 눈 돌리면 죽는다. 알지?


[승우] : 걱정 마! 앞만 보고 날아갔다 오겠습니다. 오빠 이제 가야겠다.


[세희] : 응. 몸 조심히 잘 다녀와.


[(여자) 이별 사자] : 파리에 가면 르네휘테르 샴푸랑 샤넬 백 좀 부탁해요.

그리고 에펠탑 열쇠고리도 넉넉히 좀 부탁해요.


[이별 사자] : 놀러 가는 게 아니라고요.


[신입 이별 사자] : 선배님. 사랑 위원회에 신고해버릴까요?


[이별 사자] : 신고하기 전에 제 손으로 처리해버리고 싶네요.


[신입 이별 사자] : 선배님 아까 저 여자아이가 이야기한 것 중에 "샤넬 같은 오빠"라는 말 있잖아요.

이거 샤넬을 사 오라는 걸까요? 아님 정말 순수하게 오빠만 기다린다는 걸까요?


[이별 사자] : 후배님도 여성 언어학 수업을 들어봐서 알겠지만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저급한 언어가 아닙니다.

"샤넬 같은 오빠" 표면적인 의미에서 멈추지 말고 그 속에 있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보세요.


[신입 이별 사자] : 그럼 선배님은 벌써 어떠한 의도인지 파악했다는 말씀이세요?


[이별 사자] : 그렇게 저급한 언어가 아니래도.... (말을 흐리며 돌아선다.)


[신입 이별 사자] : (혼잣말) 모르네. 몰라.


그렇게 승우는 세희와 물리적으로 멀어져 갔다. 커다란 비행기 가장 앞자리에 자리 잡은 승우는 유난히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는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과 마주했다. 평소와는 다른 진지함과 웃음기 없는 승우의 얼굴이 나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검게 물들인 저 검은 안경이 마치 밝게 웃고 있는 세희의 모습마저 가려버린 것 같았다.


[기내 방송] : 여러분의 여행길을 이별 항공과 함께 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하 생략)


오랜 시간을 날아온 승우와 세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던 그때보다 더욱 먼 거리감을 느끼는 듯했다. 떨어진 거리만큼 서로 해가 뜨고 저무는 시간이 달랐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달랐다. 세희가 승우를 부를 때 승우는 매번 한걸음에 답하지 못했다. 승우를 기다리는 긴 시간은 상대방 이별 사자가 만들어낸 불안함으로 대신 채워졌을 것이다. 승우의 빈자리는 승우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아쉬움과 섭섭함으로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별과 맞닿아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도도하고 차가운 상대 이별 사자는 차가운 미소와 함께 더욱 증폭시켜 나갈 것이다. 세희의 바이올린 연주는 더욱 외롭고 서글프게 작은 공간을 물들일 것이고 그 공간에 몸담은 세희도 슬픔으로 가득 찬 공감에 함께 물들어 갈 것이다. 먼 곳에서 승우가 세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승우 In 파리, 세희 In 서울>


[세희] : 파리는 어때?? 오랜만에 파리 가니 좋지? (내가 없어서 별로라고 말해줘.. 내가 보고 싶어서 한국이 그립다고 말해줘...)


[승우] : 응! 날씨도 좋고 파리는 올 때마다 너무 좋아! 시간만 된다면 좀 더 머물고 싶어.


[세희] : 그렇구나... 알았어. 나 피곤해서 이만 잘게.


[승우] : 벌써 자려고? 오랜만에 우리 연락됐는데.


[세희] : 응. 나 잘게. 한국 오면 봐.


[이별 사자] : 망. 했. 다.


[(여자) 이별 사자] : 미친 거 아니에요. 혹시! 승우 여자 생겼어요? 프랑스에 숨겨둔 여자 친구가 있었던가? 아니면 직장 동료랑 눈 맞았죠? 어떤 여시 같은 계집 애지?


[이별 사자] : 그런 거 아니에요. 제발 혼자 소설 좀 쓰지 마요.


[(여자) 이별 사자] : 돌아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해명이나 해요. 조작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


승우의 무심한 행동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원래 그런 남자라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승우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이와 같은 대화의 패턴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던진 본심을 숨긴 세희의 덫에 [상대 이별 사자의 작품이기도 하다] 승우는 항상 보기 좋게 걸려드는 듯했다. 반복되는 승우의 순진 무구하고 원초적인 대답들은 세희의 마음속에 작은 상처들로 남을 것이다. 상대 이별 사자의 감점 체크 항목이 늘어날수록 세희의 말투 속 까칠 지수는 급속도로 올라가는 듯했다. 불안함에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는 나와 다르게 승우는 항상 어제와 다르지 않게 잔잔해 보였다. 승우는 시간이 날 때면 에펠탑이 한눈에 보이는 카페에 앉아 한참을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노을이 질 때쯤 작은 종이에 무언가 잠시 끄적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바심이나 불안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신입 이별 사자] : 승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읽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말 세희에 대한 마음이 그리 크지 않은 걸까요? 아직 다혜를..


[이별 사자] : (서둘러 후배의 말을 끊으며) 그건 아닐 거예요. 그냥 승우란 아이가 원래 그런 걸 거예요. 미치도록 눈치도 없고 조금은 무덤덤한. 그나저나 이걸 상대 이별 사자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가 걱정이네요.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 2박 3일이라는 짧은 여정은 한걸음 한걸음이 위태위태한 외줄 타기와도 같이 흘러갔다. 매 순간을 마음 졸여온 나를 토닥여 주듯 승우는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선물했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별들의 아름다움에 나에게도 잠시 여유가 찾아온 듯했다. 인간들은 소중한 사람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되면 별이 된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크고 작게 반짝이는 별들이 한때는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들처럼 보였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별의 아름다움은 수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모습일 것이다. 마치 사랑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승우도 나와 같은 곳을 보며 누군가를 그리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나를 찾은 잔잔한 시간은 내 곁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떠오르자 반짝이던 별들은 황급히 모습을 숨겼고 떠오르는 태양 아래로 활주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승우는 곧 있을 착륙 준비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지와 가까워질수록 바삐 움직여야 하는 것은 승우뿐만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세희와의 만남에서 승우가 치러야 할 사랑의 예비고사에 나 또한 분주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예비고사는 본격적인 사랑에 앞서 두 사람이 치르는 아주 간단한 시험이기도 하지만 요즘 들어 가장 많은 탈락자가 발생하는 사랑의 관문이기도 하다. 더욱 슬픈 사실은 이 곳에서 탈락한 커플들은 이별 사자들이 이별 장부에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마치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가볍게 지워 버릴 것이다. 승우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커다란 비행기를 익숙한 공간에 살포시 내려 앉혔다. 비행기가 멈추고 모든 사람이 내린 후에야 승우의 표정은 오래전 바보 같았던 그때의 모습을 되찾았다.


[신입 이별 사자] : 이제야 승우답네요.


[이별 사자] : 그런데 진지한 모습도 나쁘지 않았어요. 승우야! 그런데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잘해라.


함께 긴 여정을 마친 사람들이 남은 수속 절차를 기다리며 뒤엉켜 있는 동안 승우는 어느새 제복을 입은 동료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여유롭게 출국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출국장 앞 지인들을 기다리는 수많은 시선들이 승우의 무리를 훑고 지나갔다. 승우의 작은 특권이 승우를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목을 길게 빼고 이리저리 승우를 찾던 세희도 승우의 특별함을 느꼈을 것이다. 중요한 시험에 앞서 다소 괜찮은 출발인 듯했다. 다행히 승우가 세희를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승우는 세희에게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보다 더욱 가벼운 발걸음으로 말이다.


우리는 잊고 사는 거 같아요. 이별 이야기가 오래전 사랑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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