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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스틸러 Mar 06. 2016

설렘 사막화

'잊혀 가는 처음이 주는 설렘'

한참을 요란하게 달려 2호선 지하철이  데려다준 곳은 익숙한 듯 낯선 나의  모교였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곳곳에 묻어 있는 나의 추억들을 꺼내어 보기에는 아직 충분했다.
10년 전 나는 스무 살이란 완장을 차고 바다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지금 내가 서있는 웅장한 본관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이것이 설렘으로 가득 찬 사회의 첫걸음이었다.


'꿈으로 가득 찬 세상'


꿈에 그리던 서울 생활의 첫 보금자리는 기숙사였다.
논스톱 1장 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름다운 여학우들은 기본이고 항상 즐거운 사건 / 사고가 나를 반겨 줄거라 일러주셨다.
이상과 현실에는 언제나 갭이  존재하는 법이다.
꿈으로 가득 찼던 기숙사 생활은 첫 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룸메이트의 수많은 빨래 더미에 둘러싸여 처참히 무너져 버렸다.
그저 남는 것이라곤 말도 안 되는 사건과  사고뿐 이였다.
내가 그리던 생활과 사뭇 달랐지만 나에게 허락된 여섯 평도 안 되는 공간과 소소한 자유는 나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다가올 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꿈꾸는 세상을 그리기 바빴고 그 속에 두려움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스무 살에 나는 그랬다.


'서울 짝꿍들과의 첫 만남'


목적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보다는 발에 의지해 몸이 시키는 대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멈춰 선 곳은 서울 짝꿍들을 처음 만날 수 있었던 작은 건물의 과방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내 몸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과방은 현대식 대리석으로 다시 태어나 10년 전 비만 오면 물이 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새 옷을 입은 과방은 보기 좋았지만 추억 속의 모습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미지근하게 남았다. 돌아오는 길 나의 아쉬움을 달래 준 것은 10년 전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작은 등나무였다.
외로울 때나 슬플 때.. 행복할 때.. 아무 이유 없을 때도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추억의 공간이었다.

문득 등나무 아래서 서울 친구들에게 서울말 과외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에서는 같은 반 친구를 '짝지'라고 불렀지만 서울 친구들은 '짝꿍'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너무나 귀여운 이 말이 경상도 남자의 입에 익숙해지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화려한 나의 대학 생활을 함께 만들어갈 그 친구들과의 첫 만남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느껴질 정도로 인상 깊었다.
머나먼 부산에서 상상하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힘들 때마다 위로받을 수 있었던 20대에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갈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자주 보지 못하지만 추억 속의 그들의 모습은 항상 나를 향해 웃어 주었고 나 또한 그들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다.


'처음  뛰었던 심장'


뛰어다니던 이 길을 조금 걸었을 뿐인데 벌써 다리가 나에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지나버린 세월을 외면하지 못한 채 가까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문득 바라본 옆자리에는 웃음소리가 끊기지 않는 캠퍼스 커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둘만 기억하게 될 끝을 알 수 없는 멜로드라마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떨어질 줄 모르는 앳된 두 손들을 보며 홀로 방치된 차가운 손을 괜스레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더욱 외로워 보이는 손 너머로 마음속에 깊이 숨겨 두었던 10년이 지나버린 나만의 멜로드라마가 떠올랐다.
영화관에서 잡았던 그 여자아이의 손결은 마치 어제 잡았던  것처럼 아직 생생했다.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팝콘을 더듬거리다... 엉겹겨레 잡아 버린 그 아이의 손에 나의 모든 신경은 집중되었다. 긴장한 손은 금세 땀이 흥건했고 한참을 굳어 있던 자세 덕분에 팔은 저려왔지만 다시 잡을 용기가 없다는 핑계로 힘겹게 잡은 그 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스무 살에 심장이 처음 뛰기 시작했다.



괜찮아진 다리를 확인하고 달콤한 커플을 뒤로한 채 벤치를 일어섰다.
추억 속을 벗어나 학교를  빠져나오며 가장 가까운 설렘을 떠올려 보았다.
반복되는 일상 때문일까...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서일까... 새해에 처음 떠오르는 태양을 봐도 아무렇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설렘이라는 감정은 지나가는 세월과 함께 사라져 갔다.
지금 이 순간! 처음 경험함으로써 설레던 순수한 마음이 그립다.  


글: 심스틸러
그림: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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