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간은 흘러 7월이 되었고 나는 응급실을 돌고 나서 다시 병동으로 돌아왔다. 3월에 나를 상당히 힘들게 했던 그 병동이었다. 3월에 정말 힘들었던 만큼 나름의 각오를 하고 갔다. 피를 못 뽑아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었고, 간신히 피를 뽑고 나왔는데 내가 피검사 1개를 할 동안 피검사 5개가 추가되었던 그 기억은 참 잊기 힘든 기억이었다.
제일 힘들다는 응급실을 끝내고 왔지만 안도감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걱정을 하면서 한숨을 쉬면서 출근을 했다. 원래 인턴은 6시까지 출근이었지만 3월에 항상 시간이 부족했던 기억 때문에 나는 5시 30분에 출근을 했다. 평소보다 일이 훨씬 더 많은 월요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6시 반 전에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몇몇 특수한 과를 제외하고 보통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아침 피검사를 확인하는 시간은 8시 정도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보통 7시 30분까지 피검사와 각종 아침 검사를 끝낼 것을 목표로 한다. 한 시간이나 일찍 끝냈다.
“오늘은 일이 좀 많죠?? 월요일이라 그래요. 원래는 우리 병동 일 별로 없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멋쩍은 듯이 말씀하신다.
“아 네.. 괜찮습니다!”
나는 오히려 어리둥절하면서 대답했다. 평소에는 이거보다 더 편하다는 건가?
아침 일을 일찍 끝내고 당직실에 내려와서 잠시 눈을 붙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객관적으로 일은 그리 적지 않았다. 혈액배양검사, 동맥혈 검사, 소변 줄 꼽기 등 해야 할 일들은 꽤 많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대충 가늠해보았다. 동맥혈 채혈 3분 이하, 혈액배양검사 10분 이하, 소변줄 꼽기 5분, 콧줄 꼽기 5분...
3월에는 동맥혈 채혈이 15분 이상 그러고도 실패해서 결국 다른 친구가 뽑아준 경우 다수, 혈액배양 검사는 30분 이상, 소변줄 꼽기는 10분 콧줄은 20분 이상 걸렸었는데...
모든 술기에 걸리는 시간이 절반 이하로 줄었던 것이다. 채혈을 실패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4개월의 시간은 어설픈 하수 인턴이었던 나를 능숙한 중수 인턴쯤으로는 올려주었나 보다. 4개월 동안 고생한 게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쉬던 찰나에 전화가 왔다. 콧줄을 꼽아 달라는 연락이었다. 병동에 갔다.
"선생님 이분 콧줄 여러 번 실패해서 내시경실 가서 내시경 보고 콧줄 꼽고 올라오신 분인데 올라오시자마자 콧줄 빼셨는데 식사는 하셔야 돼서..."
순간 어리둥절했다. 콧줄을 아무도 못 꼽아서 결국 내시경실에 가서 내시경 기구를 이용해서 간신히 꼽은 사람인데 나보고 콧줄을 꼽으란다. 사람들이 장난 삼아하는 말이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방법은 인턴을 시키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건 거의 뭐 그런 수준이었다. 그래도 하라는데 안 할 수도 없으니, 시도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럭저럭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4개월 동안 체득한 꿀팁 들을 총동원한 결과 30분 만에 꼽을 수 있었다.
“내시경실 또 언제 된대요?? 오늘 꼭 꼽아야 되는데..”
“그 사람 꼽았어요.”
“엥? 어떻게요???”
“인턴 선생님이 꼽았어요.”
“헐 대박..”
지나가다가 이런 대화를 들을 수 있었고,
“우와... 선생님 계속 우리 병동에 있어주세요”
“선생님 완전 짱이네요”
등의 칭찬을 간호사 선생님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어깨가 으쓱하던 찰나에 또 전화가 왔다. 옆 병동에서 콧줄 꼽을 사람이 있다는 전화였다. 이번에는 5분 만에 간단히 콧줄을 꼽았다.
"소리 잘 들리는 거 확인했습니다:)"
"소리가 들려요??"
신규 간호사로 보이는 분이 되묻는다.
슬쩍 시간을 보니 시간 여유가 좀 있다.
"콧줄은 위까지 들어가는데 제대로 들어갔을 경우에 여기에 공기를 넣고 청진기로 배 소리를 들으면 배에서 공기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네네!"
"네, 소리 잘 들리죠?"
"네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을 경청하고 콧줄 소리를 듣고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의 3월 때의 모습이 생각나서 웃음이 지어졌다. 나도 3월엔 누군가에게 저렇게 보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콧줄을 꼽을 때 꿀팁을 몇 가지 더 전해주고 다음 일을 하러 갔다.
다음 환자는 혈액배양 환자였다.
“혈액배양 있습니다.”
피검사라는 말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분이 혈액배양병을 보시더니 깜짝 놀라서 이거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이유를 들어보니, 예전에 이 검사를 할 때 8번을 찔렸다는 것이다. 정말 트라우마로 남을만한 횟수다.. 결국 못 뽑을 거 같으면 안 찌르기로 약속을 하고 혈관 상태를 본다. 이 정도면 할만하다. 찔렀다. 다행히 한번 만에 뽑았다. 내 인턴 동기들 중에 이걸 못 뽑을만한 애는 없을 텐데.. 하다가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 몇 월에 하셨는데요?"
"3월인가 4월인가.."
의문이 해결되었다. 인턴들 대다수가 피를 잘 못 뽑았을 그때였다. 피 한번 뽑을 때마다 온몸을 적실만큼 식은땀을 흘려댔던 그 시절이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인사를 하고 나왔다.
물론 병원은 여전히 바쁠 때는 아주 많이 바빴고 아주 가끔씩 나도 술기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채혈이 두렵지 않았고 3월의 어설퍼 보이던 초짜 의사들은 제법 의사 티가 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병원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