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인턴의 시간- 18. 인턴과 간호사

 인턴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직종은 무엇일까? 교수님? 레지던트? 우선 인턴이 교수님을 만날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레지던트 선생님도 자주 컨택이 있긴 하지만 이 분들만큼은 아니다. 인턴에게 하루 평균 30회 이상 전화를 하고 일이 가장 많이 겹치며, 업무 중 생기는 희로애락을 공유하기도 하고 가끔은 서로 화를 내기도 하는 때로는 인턴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때로는 인턴들의 주적이기도 한 간호사 선생님들, 인턴들이 가장 많이 마주치는 분들은 바로 이 간호사 선생님들이다.     


 나는 인턴을 시작하기 전 간호사 선생님들에 대한 굉장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인턴 x라는 책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의 인턴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이 책은 상당히 흥미로웠고 재밌었다. 그래서인지 2019년의 한국이 1960의 미국과 같을 리가 없음에도 나는 이 책의 많은 내용들을 사실로 믿었었다.     

 그 책에서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인턴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새벽에 필요 없는 일로 전화를 해서 인턴을 깨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턴을 괴롭히는 모습들이 나온다. 그래서 인턴을 시작하기 전의 나는 간호사 선생님들은 인턴을 괴롭히는, 천사표 이미지 뒤에 악마 날개를 단 사람들인 줄 알았다. 하지만 뭐 예상했다시피 이건 다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괴롭히기보다는 배려를 해주려고 한다. 그렇다고 인턴과 간호사의 사이가 좋냐 하면 그건 또 애매하다.     


 오늘은 정말 인턴과 간호사의 관계가 어떤지를 나한테 제일 잘 느끼게 해 준 하루였다. 그날 나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환자 이송을 다녀왔었다. 고된 하루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다시 부산에 있는 우리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내 당직이 시작되었다. 병원은 환자들의 상태에 따라서 일이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날은 정말 이럴 수도 있구나 할 정도로 일이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이 많은 날도 있다. 그리고 그 날은 정확히 후자였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엄청나게 걸려왔다.     

 “선생님 항암제 달아주세요.”

 “피검사 있어요.”

 “심전도 찍어주세요.”     

 그리고 나는 정말 쉴 새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잠을 자고 출근을 할 수 있었기에..     

 하지만 내 몸은 하나였고 일은 정말 너무나도 많았다. 일이 엄청 많이 쌓였다. 인턴이 늦게 갈 경우 화를 내는 환자분들이 꽤나 많다. 그리고 인턴이 올 동안 그 화를 감당해야 하는 건 당연하게도 그 병동에 상주하는 간호사분들이다. 그래서 인턴이 조금이라도 늦게 온다 싶으면 간호사 선생님들은 바로 독촉 전화를 한다.      

 “선생님 항암제 있다고 말했는데요.”

 “환자분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빨리 좀 와주세요.”     

 하지만 계속 일하고 있는 인턴 입장에서는 독촉 전화는 정말 스트레스받는 일이다. 무균 장갑을 끼고 있었다면 장갑을 벗어야 하는 등 일의 흐름을 끊어 일을 훨씬 오래 늘어뜨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 그래도 일도 많고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오는 독촉 전화는 인턴의 신경을 날카롭게 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 항암제 있다고 말했는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환자분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빨리 좀 와주세요.”

 “저도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기다리세요.”     

 전화를 받느라 벗었던 장갑을 버리고 새 장갑을 끼려는데 전화가 하나 더 온다.     

 “선생님 동맥혈 검사 피가 굳었는데 검사 다시 해주실 수 있나요?”     

 동맥피를 뽑는 것은 인턴 일이고 정맥피를 뽑는 것은 간호사의 일이다. 하지만 동맥피는 무조건 동맥에서 뽑아야 하지만 정맥 검사는 사실 동맥에서 뽑든 정맥에서 뽑든 상관이 없는 검사들이다. 다만 정맥에서 뽑는 것이 통증이 덜해서 정맥피로 검사를 할 뿐이다. 이 때문에 정맥 검사와 동맥검사가 같이 있을 경우 간호사 선생님들은 주로 정맥 검사를 우리한테 부탁을 한다. 하지만 채혈량이 늘어나면 피가 굳을 확률도 올라간다. 그리고 동맥검사를 할 때 사용하는 피를 안 굳게 하는 주사기가 있는데 정맥 검사까지 같이 해줄 경우 이 주사기를 사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정맥 검사를 같이 해주면 피가 굳을 확률이 올라간다. 그리고 당연히 굳어버린 피로는 검사가 안 된다. 또 뽑은 피를 검사실로 내리는 건 간호사 선생님들 일이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피가 늦게 내려가면 잘 굳는다.      

 물론 동맥검사하느라 환자를 한번 찌르고 정맥 검사한다고 환자를 한 번 더 찌르는 것보다는 한 번에 검사를 다 하는 것이 환자분들에게는 훨씬 낫다. 또 피검사는 계속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검사를 모아서 내려가는 게 맞긴 하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피가 굳는 경우는 가끔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게 합리적이긴 하다.     

 하지만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피가 굳어서 검사를 다시 해야 하는 경우 원망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검사 결과가 이제 나올 정도면 피를 얼마나 늦게 검사실로 내린 걸까?’

 ‘내 거만 뽑을걸 괜히 남 일 해주다가..’ 등등의 생각이 들면서 원망감이 든다.     



 하지만 항상 간호사 선생님들이 밉기만 한건 아니다. 오히려 고마운 일들이 더 많다. 하나의 병동 일을 끝내고 다음 병동으로 넘어갔다.     

 “선생님 바쁘신 것 같아서 저희가 다 했어요! 이것만 해주시면 돼요:)”     

 활짝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간호사 선생님의 모습은 일에 치여 있는 나에게 정말 나이팅게일의 환생으로 비쳤다.     

 “헉.. 감사합니다. 정말..”     

 일을 대부분 처리해주신 간호사 선생님들 덕분에 다음 병동으로 빠르게 넘어갈 수 있었다. 다음 병동에서는 힘내라고 나한테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헐 정말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비록 가격은 얼마 안 하는 음료수이지만 남이 주면 정말 신기하게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난다.     

 일이 대부분 끝나가던 찰나에 전화가 왔다. 일이 정말 많았고 급한 일도 많았어서 내 시간을 대부분을 앗아간 병동이었다.     

 “선생님 수혈 동의서 좀 받아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얼른 가서 동의서를 받고 간 김에 수혈 확인도 같이 하고 떠나려던 찰나에 간호사 선생님이 쪽지와 과자를 하나 주셨다.      

 ‘천사 인턴 선생님 먹고 힘내세요!’     

 하루 종일 힘들고 짜증 나는 일들 투성이었고 다리도 미친 듯이 아팠지만 이 ‘천사’ 한마디에 신기하게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내가 천사라니..     

 인턴에게 간호사 선생님들은 가끔씩은 밉기도 하지만 가끔씩은 정말로 고마운 그런 애증 관계의 분들이다. 각자의 사정이 있기 때문에 예쁜 말만을 주고받지 못하기도 하고, 가끔 겹치는 일들 때문에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여유가 있을 때는 우리를 도와주기도 하고 응원해주기도 하는 고마운 분들이다.

이전 17화 인턴의 시간 - 17. 다시 돌아온 병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