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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의 시간-19. 나는 무슨 과를 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내과, 외과, 성형외과 등 자신의 전문과를 선택하는 시기는 인턴 때이다. 인턴 말에 원하는 병원의 원하는 과에 원서 접수를 한다. 이때의 원서접수에는 가, 나, 다 군이 없다. 한번 떨어지면 끝이고 남자인 경우에는 떨어지면 바로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레인지'라는 게 있다. 미리 사전에 인턴의 평판, 학교 성적, 국시 점수 등을 고려하여 합격자를 미리 정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떨어진 사람도 다른 과를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매우 합리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맥이 개입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요즘은 거의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과를 선택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수술과, 비수술과. 메이저, 마이너 인기과 비인기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과를 결정할 때는 보통 인기과 비인기과로 나누어 생각한다. 피부, 성형, 재활, 마취, 정형, 이비인후과 영상의학과 이 일곱 과를 인기과라고 한다. 어디를 가나 이 일곱개 과는 경쟁력이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중 나는 이비인후과 지원자였다. 이유는 편도절제 등, 간단하고 오래 걸리지는 않지만 상당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수술들을 많이 배울 수 있고 진료를 볼 경우에도 상당히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과여서 관심이 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다른 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말 학생 때는 생각도 안 했던 내과였다. 일의 강도가 높고 그에 반해 수입은 상대적으로 낮은 과이다. 응급 환자나 중증환자를 많이 보기 때문에 환자분들의 원망을 사기도 쉽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의사여도 고칠 수 없는 병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 때부터 '내과를 가느니 과를 선택하지 않고 미용을 하겠다'느니 '내과 가느니 군대 간다', '내과 특징: 내 과는 아님' 등의 말을 달고 살았다. 의사들의 커뮤니티인 메디게이트에도 '내과는 가지 말라'느니 '아직 내과 1년차면 때려치우고 군대 다녀와서 정형이나 재활에 도전해라'라느니 하는 말들이 많다. 그런데 대관절, 내과라니?     


 인턴을 하면서 느낀 내과는 조금 다른 곳이었다. 앞서 학생 때 했던 생각들이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턴의 입장에서 본 내과는 그런 것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과였다. 심정지 방송이 울리면 가장 먼저 뛰어와서 환자를 살리는 사람들이 내과 선생님들이었고 응급상황이 터져서 다른 과 선생님들이 당황해하고 있을 때 달려와서 과감히 응급처치를 해주는 것 역시 내과였다. 내과는 분명 힘들고 돈도 잘 못 버는 과였다. 하지만 인턴이 되어서 겪어본 내과는 단순히 그렇게만 정의할 수 있는 과는 아니었다.     


 심근경색 환자분이 퇴원하실 때 내과 교수님한테 교수님 덕분에 살았다고 감사드리던 모습이 기억났다. 비행기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였을 때 너무 당황스러웠고 많이 피곤한 상태였지만 몸이 사람 살리는 법을 기억하고 있어 적절한 응급처치를 해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던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어제 당직 때 이런 환자가 있었는데 자신이 이런 응급처치를 해서 환자를 살려냈다고 하시던 레지던트 선생님의 말씀도 떠올랐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고 내과 선생님들은 이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정말 멋있어 보였다.     


  응급실에는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가 응급처치 후 괜찮아지는 환자들이 자주 온다. 이럴 때에 기록을 보면 다른 병원 내과 선생님들은 정말 최소한의 약물로 안 좋아졌던 환자를 다시 회복시켜서 우리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온다. 할 수 있는 검사도 별로 없는 작은 병원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고 신속한 응급처치를 했는지가 정말 신기하고 대단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맛있는 것과 먹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호텔보다는 호스텔에서 묵는 걸 좋아하고 택시보다는 카풀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하는 걸 선호한다. 맛있는 코스요리보다는 국밥 한 그릇이나 떡볶이를 훨씬 좋아한다. 내가 그렇게 큰돈을 벌 필요는 없다.     

 인턴 생활에 적응하여 인턴생활이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되었을 때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외래에 앉아서 조용히 일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지루함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새로운 일을 배울 때가 가장 즐거웠고 정신없이 뛰어다닐 때가 가장 보람찼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다 해결했을 때 제일 행복했다. 다른 과들과는 다르게 내과는 학문의 양이 정말 방대해서 평생을 공부해도 지루할 틈이 없다고 한다. 내과는 일이 많아서 중간에 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고 응급 상황이 터질 때마다 달려가야 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리고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고 정말 너무 멋있었다. 여전히 이비인후과는 매력적인 과다. 하지만 계속 내과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내과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기로 했다. 당시에 내과를 돌던 중이어서 내과 회식에 참석했다.     

 “저희는 저희 일 년차 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아래 년차 들어오면 진짜 잘해주려고요.”     

 “일은 조금 힘들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다들 정말 좋아서 할 만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당직만 아니면 6시 칼퇴 가능해요”     

 “너 어젯밤 11시까지 일하는 거 다 봤는데? 당직 아니었잖아”     

 “아.. 그날은 일이 좀 많아서”     

 분위기는 정말 화기애애했다. 내과는 사람들이 정말 좋다는 건 사실이었다. 인턴들 사이에서도 내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다들 성격이 좋기로 유명하다. 만약 인턴들이 가장 좋아하는 레지던트 투표를 한다면 아마 1, 2 위는 무조건 내과 선생님들일 것이다. 일이 힘든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당직이 아닌데도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레지던트 선생님들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내과는 다른 과보다 중한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많이 입원해 있고 이런 환자들은 갑자기 급속도로 안 좋아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그 어떤 레지던트도 자기 환자가 안 좋아졌는데 그 환자를 당직한테 맡기고 퇴근하지 않는다. 때문에 내과가 칼퇴가 불가능한 날이 많은 건 필연적인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 레지던트 수련 시작했을 때 실수를 할까 봐 굉장히 무서워하더라고 그래서 우리 병원은 처음 한 달 동안은 윗년 차랑 일대일로 하루 종일 붙어 다니게 하고 있어. 모르는 거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볼 수 있어서 실수할 걱정은 절대 없지.”     

 “레지던트 때 처음으로 내가 담당하는 '내 환자'라는 게 생기거든. 처음으로 맡은 환자들이어서 이 환자들에 대한 애정이 다들 각별해. 그래서 처음으로 맡은 환자가 안 좋아지면 굉장히 힘들어하더라고. 내과 수련을 중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하고. 근데 그럴 때마다 신경 써서 위로해주고 하면 그래도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열심히 일하더라고."     

 내과 교수님들 역시 굉장히 사려 깊고 레지던트를 배려할 줄 아시는 분들이었다. 실제로 레지던트 선생님들한테 듣기로도 내과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합리적이고 그리고 레지던트 생각을 많이 해주신다고 한다.     

 그리고,


 “너 내과 오면 진짜 잘할 거 같은데...”     

 “와주시면 정말 고맙죠.”     

 무엇보다 나를 너무나 반겨주신 다는 점이 좋았다. 이비인후과 선생님들도 물론 좋으시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다소 무뚝뚝한 편이었다면 내과 선생님들은 나에게 정으로 다가와 주신다. 사람 속을 자주 들여다봐서 그런가?     

 회식 때 내가 평소에 존경하던 순환기 내과 교수님도 계셨다.     

 “교수님 혹시 심장 중재술 배우려면 몇 년 정도 해야 되나요?”     

 “그거 우리 병원에서 펠로우 2년 만하면 충분히 배울 수 있어”     

 심근경색의 치료법이자 내가 내과를 한다면 꼭 배우고 싶었던 심장 중재술을 레지던트 3년과 펠로우 2년, 총 5년만 배우면 배울 수 있다고 하신다. 사실 심장 중재술 같은 경우에는 워낙 고난도의 시술이어서 10년은 배워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금 더 내과에 마음이 끌렸다.     

 회식은 일찍 끝났다. 다들 다음날 또 일해야 되기 때문에 내과의 회식은 일찍 끝난다고 한다. 이런 점들이 굉장히 좋았다. 회식이 끝나고 집에 와서 혼자 생각을 해보았다. 이비인후과는 분명 매력적인 과였다. 외래 진료부터 간단한 수술까지 환자한테 정말 해줄 수 있는 게 많은 과였다. 하지만 정말 생명을 살리는데 직결되는 수술을 많이 하는 과는 아니었다. 조금 더 힘들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같은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응급환자가 생겼을 때 주저 없이 응급처치를 해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그런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고민 끝에 다음 날 내과를 가겠다고 교수님께 문자를 보냈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미래에 내과 일이 너무 힘들어서 다른 편한 일을 찾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앞으로 3년 동안은 내과 공부를 하면서 사람 살리는 법을 배워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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