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독서실

by 김설원

하루라도 빨리 시나리오를 써야 하건만 거대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 손금이라더니 잘도 들어맞는다. 새해의 문이 열리고 며칠 후 탐스러운 행운이 굴러들어 왔다. 연미가 물고 온 박씨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시나리오를 쓰던 작가가 갑자기 손을 뗐다고 했다. 그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쪽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결국 그 불을 내가 끄게 된 것이다. 영화제작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황 피디의 연인 연미를 통해서. 늦어도 3월 말까지 초고를 넘기기로 했다. 원래는 전임 작가가 1월 중순까지 시나리오를 쓰고, 3월부터 촬영할 계획이었단다. 두 번째 행운은 대학 강의다. 이것도 원래 임자가 따로 있었다. 누군가의 속사정, 또는 변심으로 생긴 구멍을 메우는 일이 동시에 밀려오니까 가르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땜장이로 불려 다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모처럼 마음속에 돋아난 파릇한 새싹들은 금세 짓이겨졌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구둣발로 힘주어 밟아 댄 것처럼 말이다.

독서실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곧추세워진다.

“어디 보자… 이 전기선을 에어컨 뒤로 빼면 되겠어.”

“책상을 많이 없애야겠는데요.”

“독서실이 너무 넓어. 이용하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아주 텅텅 비었군.”

거만한 목소리 앞에서 연신 네, 네, 거리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아, 자리에 계셨네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자 계시니까 편하고 집중도 잘 되지요?”

남자가 굳이 넉살 좋게 말을 붙인다. 내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피하자 그가 다른 책상을 기웃거린다.

“얼른 나오지 않고 뭐해!”

독서실에 대고 적자 운운하던 거만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소리친다. 그가 또 네, 네, 하면서 촐랑촐랑 뛰어나간다.

엊그제 내가 택배를 받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독서실의 이용권을 끊는 거였다. 일단 집을 벗어나자는 생각만 오롯했다. 처음에는 인근 호텔을 떠올렸다. 산뜻한 편의시설이 빼곡하게 들어선 동네에 자리한 비즈니스호텔이다. 우리 아파트에서 산책하듯 30분쯤 걸으면 닿는다. 이런저런 할인 혜택을 받으면 8만 원 대의 숙박료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 호텔 가까이에 메가박스도 있으니 심야 영화라도 즐겨 볼까. 1년에 두 번쯤 이런 호사를 누려보자고 마음만 먹으면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었다. 오늘 당장 실천하자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등 뒤에서 뭔가 탄력 있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새가 날갯짓을 하며 휙 날아가듯이. 그건 현수막이었다. ‘베스트독서실 새 단장 오픈!’ 여기서 5년째 살면서도 아파트 단지 안에 독서실이 있는 줄 몰랐다. 현수막의 느낌표가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어서 오라고, 너를 안전하게 감싸 주겠다고. 나는 주저 없이 발걸음을 돌려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아파트 주민들만 출입할 수 있는 베스트독서실의 한 달 사용료는 이만 원이었다. 한 달이 길면 보름, 또는 일주일씩 원하는 날짜만큼 이용하고 값을 치르면 되는 ‘입맛대로’ 조건이 만족스러웠다. 나는 일단 보름 이용권을 끊었다. 아파트 관리실 여직원이 키를 건네줬다. 내 자리는 17번이었다. 분필 토막 같은 키를 동그랗게 홈이 파인 곳에 대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어두침침했다. 저쪽 구석 자리에만 빛이 고여 있었다. 시커먼 뒤통수가 얼핏 보였다. ‘혼자 있어도 그렇지, 왜 불을 죄다 꺼 놔’ 나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내 자리를 찾아 조용조용 걸었다. 17번 자리에 붙어 있는 스탠드의 빨간 스위치를 눌렀다. 눈앞이 순식간에 밝아져 움찔했다. 넉넉한 통로, 사물함과 책꽂이가 딸린 책상, 에어컨, 회원들이 알아서 온도를 맞추는 난방장치, 정수기, 전신거울… 이만하면 훌륭했다.

베스트독서실은 올 때마다 비어 있다. 애초부터 주민들에게 관심 밖의 공간인지, 아니면 공교롭게도 내가 등장할 때만 사람이 없는 건지, 오늘은 으스스한 느낌마저 든다. 스탠드 불빛이 오히려 어둠과 정적을 부각시킨다. 톡톡 톡톡톡, 아무도 없는 독서실에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 본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불규칙한 리듬이 생물처럼 파닥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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