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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원 Mar 06. 2023

이제 거북이들이랑 살라고요?

  명자씨는 빛바랜 유모차에 박스를 실었다. 며칠 전부터 집 근처에 자리한 마트, 편의점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얻은 죠리퐁박스다. 짯짯한 햇살이 스며들어 윤기가 흐르는 박스, 가을 들녘의 볏가리 색깔이다. 명자씨는 죠리퐁박스에 코를 가까이 댄다. 볶은 참깨 냄새가 맡아진다. 완희는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처럼 디자인한 ‘죠’자를 보면 태권도 선수의 발차기가 떠오른다고 했다. 얍! 하고 흉내 내던 완희의 기압소리가 생생히 들려온다. 

  요즘 부쩍 발걸음이 둔해진 명자씨는 유모차를 끌고 아파트 맞은편 공원으로 걸어갔다. 나무들마다 봄기운이 가득하다. 소나무, 대나무, 측백나무, 벚나무…… 다들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전해지는 느낌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새들의 목소리도 한결 예뻐졌다. 명자씨는 측백나무 옆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유모차도 안전하게 세워 놨다. 이 시간에는 공원을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마음이 편하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까. 명자씨는 휴대전화를 꺼내 완희가 저장해둔 동영상을 열어 볼륨을 조금만 올렸다. 새들이 놀라 날아갈까 봐.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는다는, 그래서 트로트의 황제로 불리는 가수가 참말로 맛깔스럽게 노래를 부른다. 대번 따라 부르게 만든다. 깔깔거리며 놀던 옥희 순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변했을까…… 자야 자야 명자야! 찾아 쌌던 어머니…… 명자씨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명자씨는 자기 이름 ‘명자’가 참 마음에 든다. 몇 년 전 국립경주박물관에 갔다가 나무와 꽃 이름을 알려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올 때부터 좋아하게 됐다. ‘명자나무’라고 새긴 팻말을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가 자기를 큰소리로 부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 이름 아래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봄에 피는 꽃 중에서 가장 붉대요. 그 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청순해 보여서 ‘아가씨 나무’라고도 불러요. 

  명자씨는 속으로 ‘화려하지 않고 청순하다, 내 얘기를 하고 있잖아!’ 라고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명자꽃에 얽힌 전설도 인상 깊게 다가왔다. 옛날 어느 마을에 상처한 남자가 새 아내를 맞아 들였다. 남자는 아들을, 새 아내는 딸을 데리고 가정을 꾸렸다. 배가 다른 오누이는 사이좋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오빠의 눈에 여동생이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깊은 고민에 빠진 오빠는 결국 수도승이 됐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여동생은 병을 얻어 죽었다. 여동생의 무덤에서 자란 나무가 바로 명자나무다. 그래서 명자꽃이 선홍빛이구나! 요즘처럼 봄의 발길이 잦아질 때면 명자씨는 어김없이 명자꽃 전설을 떠올렸고, 그게 마치 자신의 전설인 것처럼 여겨져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지곤 했다. 


  한낮인데도 아파트 주변 상가들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고요하다. 누가 유리문을 똑똑 두드리기에 봤더니 ‘부동산뱅크’ 사장이다. 그가 손을 흔들며 헤벌쭉 웃는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소개해준, 명자씨보다 세 살 많은 사장인데 어디서든 명자씨가 눈에 띄면 저렇듯 반갑게 알은 체를 한다. 명자씨는 단골 야채가게에 들러 두부, 멸치, 양파, 상추를 샀다. 주인여자가 완희는 언제 놀러 오느냐며 말을 붙인다. 내 새끼, 점심은 먹었나…… 완희는 명자씨의 손녀다. 비교적 늦게 신접살림을 차린 큰아들이 결혼 7년 만에 얻은 딸. 아들 내외는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명자씨는 1남 2녀를 뒀다. 모두 결혼했다. 두 딸은 출산 계획이 없단다. 첫째 딸은 언제까지 뒷바라지할 능력도 자신도 없어서, 둘째 딸은 양육에 쏟아 붓는 돈과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쓰겠다나 뭐라나. 명자씨가 보기에 딸들의 주장은 포장만 달랐지 같은 내용물이었다. ‘아이들이 있어야 집 안에 훈김이 돌지 않겠냐’ ‘여자로 태어났으면 엄마 소리를 들어봐야지’ ‘너희들 죽으면 누가 제사상을 차려준다니?’ 이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말이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구닥다리 노인네 취급을 받기 싫어서였다. 

  이런 사정으로 명자씨에게 완희는 처음이자 마지막 손녀였다. 그래서 애지중지 키웠다. 함께 살았던 아들 내외가 맞벌이 부부라서 손녀 양육은 온전히 명자씨 차지였다. 그 ‘온전히’에는 어떤 불만도 짜증도 섞여 들지 않았다. 그저 즐겁기만 했다. 그러다 아들 내외가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사정상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명자씨가 완희를 돌보기로 했다. 그때 완희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완희와 함께 4년 동안 살 수 있다니, 그야말로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들 내외가 작년 겨울에 돌연 완희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완희는 5학년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명자씨가 발끈했다. 약속이 틀리잖냐? 좋은 대학에 가려면 초등학생 때부터 단단히 기초를 닦아놔야 해요. 겨우 초등학생인데, 초등학교는 여기서 졸업해도 되잖아? 겨우 초등학생이라뇨 어머니, 모르시는 말씀 하지 마세요. 아들 가족은 토끼의 해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하필이면 엄동설한에 이 도시를 떴다.  


  “완희야, 베란다에서 도마 좀 가져다주련? 햇빛에 바싹 말랐을 거야.”

  명자씨는 방금 사온 야채들을 냉장고에 넣다가 손놀림 멈춘다. 또 헛소리를 지껄였다. 명자씨는 터덜터덜 베란다로 걸어간다. 햇빛에 잘 마른 도마에는 칼질의 흔적이 빼곡하다. 완희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사용한 도마다. 재래시장에서 꼼꼼히 고른 ‘완희용’ 도마. 오늘은 두부멸치조림을 해야지. 명자씨가 도마를 보며 중얼거린다. 두부멸치조림은 명자씨와 완희가 똑같이 좋아하는 반찬이다. 두부를 먹기 좋게 썰어 냄비에 깔고, 그 위에 멸치를 골고루 올린 후 미리 만들어둔 양념장을 끼얹는다. 이렇게 두부, 멸치, 양념장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은 다음 육수를 적당히 넣고 자글자글 끓인다. 두부멸치조림을 식탁 한가운데 놓고 완희랑 함께 먹으면 꿀맛이었지. 냄비 바닥에 자박자박한 양념을 수저로 떠서 밥을 쓱쓱 비벼 먹던 완희. 

  아차,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명자씨는 신발장 앞에 세워둔 유모차에서 죠리퐁박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완희가 쓰던 작은방 책상 서랍에서 가위, 자, 칼, 연필을 꺼냈다. 명자씨는 죠리퐁박스의 이음매를 칼로 자른다. 박스가 두 배로 커졌다. 명자씨는 양손에 자와 연필을 쥐고서 박스에 선을 긋는다. 직사각형 모양이 그려졌다. 좀 삐딱한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끄덕이면서 직사각형대로 가위질을 한다. 완희는 죠리퐁박스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어디서 그 박스를 얻어갔고 와서는 네모반듯하게 잘라 가방에 넣고 다녔다. 죠리퐁박스에 4B연필로 그림을 그리면 강아지나 장미꽃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나? 아들 내외가 다음 달에 내려온다고 했으니 그때 완희에게 ‘죠리퐁 도화지’를 안겨줄 참이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명자씨가 깜짝 놀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택밴데 집에 계십니까?”

  “택배요? 누가 그걸 보냈댜? 난 모르겠네…….”

  “운송장에 거북이라고 써 있네요. 지금 올라갑니다.”

  거북이? 명자씨는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며 초인종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택배기사가 후다닥 놓고 간 누런 박스를 열자 습자지 같은 종이가 덮여 있다. 종이를 벗겨내자 초록색 거북이 여덟 마리가 가족처럼 어울려 있었다. 그 중 몇몇은 명자씨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가 어디예요?"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살아 꿈틀대는 거북이가 아니다. 누가 잘못 보냈구먼. 이걸 어쩐다. 거북이들 앞에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부동산뱅크 사장이다. 

  “한여사님, 혹시 택배 받으셨습니까?”

  “방금 받았는데…… 이거 사장님이 보내신 거예요?”

  “거북이들이 제대로 찾아갔구먼요. 어때요, 택배 받으니까 기분이 좀 괜찮지요? 아들, 며느리, 손녀가 다 떠나버렸으니 얼마나 적적하실까 싶어 머리를 짜봤습니다. 남 일 같지 않아서요. 가끔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굴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됩디다. 자식들한테 뭐도 사달라고 보채고, 땡깡도 부리고요. 나도 작년 어버이날에 우리 큰손자한테 거북이를 받았는데 자꾸 보니까 걔들한테 온기가 느껴집디다. 말도 걸게 되고요. 거참 희한해요, 하하. 한여사님도 한 번 느껴보시라고.”

  “이제 거북이들이랑 살라고요?”

  손님이 왔다고, 이따 다시 연락하겠다면서 부동산뱅크 사장이 전화를 끊었다. 명자씨는 푸릇푸릇한, 크고 작은 거북이를 거실 바닥에 늘어놨다. 알을 낳으러 바닷가 모래밭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어가는 거북이들처럼 보이도록.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명자씨는 구부정하게 앉아,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북이의 동그란 눈을 톡톡 건드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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