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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원 Mar 20. 2023

형, 우리 아메리카노 마시러 가요

  J는 무슨 일로 감정의 색깔이 변하면 그 남자를 찾아간다. 샐러리맨인 그는 단아한 공원에 살고 있다. 집에서 공원까지는 느릿한 걸음으로 30분이면 닿는다. 주변이 온통 아파트 단지여서 공원이 번잡할 것 같은데 의외로 한산하다. 으리으리한 저택의 정원 같은 공원에는 새들만 드문드문 날아다닌다. 오늘은 더 한적하다. J는 훤칠한 소나무 앞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본다. “개나리도 폈는데 재미나는 일이 없을까” “출출하지 않냐?” “저기 화살나무에 누가 왔어!” J는 새들의 지저귐을 통역하면서 피식피식 웃는다. 샐러리맨에게 가려면 공용화장실을 지나 나무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일정한 모양으로 차곡차곡 놓여 있는 나무계단을 보고 있자니, 너는 이 계단의 수만큼 살았다고, 누군가가 말해주는 듯하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J는 이년 전 졸지에 가장이 됐다. 우악스러운 거인 같은 ‘불행’이 J의 집에 쿵! 하고 발을 내딛자 고만고만한 다른 불행들이 이때다 하고 따라 들어왔다. 순식간에 집이 쪼그라들었다. 길바닥에 나앉지 않은 것만으로도 황송하다고, 무얼 먹어도 소화가 잘 되고 팔다리가 튼튼하니까 아직 복이 남아 있는 거라던 어머니. 그 후 어머니는 음식점에 일자리를 얻었다. 주방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했다. 전업주부로만 살았던 어머니에게는 중노동이었으나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살림을 꾸려가기 어려웠다. J는 어머니의 한 달 수입만큼 벌지 못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기 때문이다.

  대개 어머니가 J보다 일찍 집을 나섰는데 그때마다 비틀비틀 잘 넘어졌다. 불안한 나날 속에서도 사계절은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람처럼 번갈아 드나들었다. J는 꼬박꼬박 찾아와 책임을 다하고 돌아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게 매번 위안을 받았다. 그해 초여름, 마음속에 잔설처럼 깔려 있던 불안이 분명한 형체로 눈앞에 나타났다. 결국 어머니가 쓰러진 것이다. 뇌출혈이었다. 4개월 가까이 병원 신세를 졌다. 퇴원은 했으나 거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어머니 혼자서는 외출이 어려웠다. 어머니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사이 J는 대학을 졸업했다.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까지 두 번 휴학했고, 군대에 다녀왔다. J는 급한 대로 물류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머니를 보살피다가 어쩔 수 없이 세양금속에 취직했다. 관리직 직원이었다. 노인돌봄서비스는 65세 이상만 받을 수 있었고, 기초수급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실 J는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샐러리맨은 팔베개를 하고서 벤치에 드러누워 있다. 너무나 피곤하다는 듯 혀를 쑥 내민 얼굴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측은하다. 넥타이가 반으로 접혀 가슴께에 늘어져 있다. 구두는 벗어 던졌다. 왼쪽 무릎에 오른쪽 다리를 걸친 그의 머리맡에는 두툼한 서류가방이 놓여 있다. 바지 주름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했다. 언뜻 보면 실제 샐러리맨이 누워 있는 것 같은 조형물이다. 샐러리맨에 대한 정보는 없다. 기본적으로 알려주기 마련인 제목, 제작자, 제작 년도 따위를 감춰버렸다. 한마디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다. 샐러리맨의 현재 처지를 상상해 보라는 뜻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미혼인지 기혼인지, 오늘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지쳐 있는지…… 그의 일상을 그려보면서 끈끈한 유대감을 느껴보라는 주문. 아니면 누구나 세상살이가 버겁다는, 너만 쓸쓸하고 불안한 게 아니라는 무언의 위로.

  J는 샐러리맨의 양복 자락을 깔고 앉았다. 벤치의 폭은 넓다. 제작자가 일부러 샐러리맨 옆에 누울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J는 배낭을 한쪽에 놓은 뒤 운동화를 벗고 샐러리맨 옆에 누웠다. 그의 허벅지에 다리를 올려놓는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가족 누군가에게 몸을 밀착시킨 기분이 들어 편안해진다. J는 직각으로 구부러진 샐러리맨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커다란 고깔 모양의 하늘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저 삼각형의 공간으로만 빗방울이 떨어지거나 빛의 입자가 하염없이 스며들고, 그 마법 같은 기운을 받아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되는 상상을 하다 보면 스르르 눈이 감긴다. J는 모로 누워 샐러리맨의 해쓱한 구릿빛 얼굴을 쓰다듬었다. 넥타이도 매만진다. 샐러리맨의 반쯤 내민 혀에서 휴―,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딸기 먹을래요?”

  J가 배낭을 흘깃 쳐다보며 샐러리맨에게 묻는다.

  “아까 마트에 들렀거든요. 어머니 욕실 슬리퍼를 사려고요. 마트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가는데 배낭이 묵직해요. 이상하다, 뭘 많이 사지도 않았는데…… 배낭을 열어보니까, 나참, 딸기가 들어있지 뭐예요. 나도 모르게 샀어요, 딸기를.”

  몸을 일으킨 J가 배낭에서 딸기를 꺼냈다. 투명한 사각 플라스틱 용기에 싱싱한 딸기가 이단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용기 라벨에 적힌, ‘새콤달콤 살맛나는 딸기’라는 글씨를 골똘히 쳐다본다. 이 딸기를 먹으면 정말 살맛이 날까, 어머니도 어디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상아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딸기였어요. 기억하죠? 여기 몇 번 같이 왔잖아요. 상아는 겨울에도 봄에도 딸기를 먹었어요. 초록색 꼭지를 떼지도 않고 통째로 입에 넣어서요. 윤기가 흐르면서 씨가 촘촘히 박힌 딸기를 연달아 열 개쯤 먹고 나면 상아는 이런 생각이 든대요. 살맛난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근데 형, 상아는 왜 내 곁을 떠났을까요.”

  J는 상아 이야기만큼은 꼭 ‘형’에게 들려주고 싶다. 직장 동료도 친구도 아닌, 자기보다 다섯 살쯤 많은 친형에게 말이다. 어머니가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더 이상 일을 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서 J가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을 무렵 이별 통보를 받았다. 상아는 대학원생이었다. 어디로든 한눈팔지 않고 학업에 충실해서 박사 과정까지 밟겠다고 했다. 상아의 머릿속에는 ‘유학’의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집이, 또 어머니가 건강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J도 상아와 같은 꿈을 꾸고 있을 터였다.

  “학업에 매진하겠다…… 형, 이건 핑계 같아요. 형도 누나도 동생도 없는 남자, 이게 진짜 이유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아는 시끌벅적한 집안이 좋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결혼하면 아이를 많이 낳자며 손가락도 걸고 그랬어요.”

  J는 다시 샐러리맨 곁에 누웠다. 초록빛 액세서리 같은 자잘한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조각조각 보였다. 어떤 상처든 낫게 해주는 신비한 물이 가득 담긴, 옹달샘을 닮은 하늘. 피곤에 절은 샐러리맨의 눈에도 저 하늘이 보이겠지. 제작자는 이런 구도까지 계산했구나. J는 머리를 뒤로 젖혀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봤다.

  “나도 형이나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이 어린 동생이라도 말이에요. 어머니의 망가진 몸을 혼자 감당하기가 너무 두려워요.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지고 작아지겠죠. 또 다른 병에 걸려서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이 전부인 사람으로 변해가겠죠…… 그 모습을 혼자 어떻게 봐요?”

  그때 새 한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며 ‘삐리 피피요’ 라고 지저귄다. 상아의 목소리를 닮았다. J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눈을 꾹 감으니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이러다 울음보가 터질 것만 같다. J는 벌떡 일어나 샐러리맨의 어깨를 흔든다.

  “형, 형, 얼른 일어나요.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아메리카노 마시러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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