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떠낢

by 유용선

우물가에는 폐허가 되어버린 해묵은 돌담이 있었다. 다음날 저녁, 할일을 하고 돌아오면서 얼핏 보니 조금 멀리서 어린 왕자가 다리를 늘어뜨린 채 그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너 생각나지 않니?” 그가 말했다. “여기가 딱 그 자리는 아니야.”

그에게 대답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분명 있었다, 그가 다시 이렇게 대꾸했으니까.

“아니! 아니! 날짜는 맞지만 여기가 그 장소는 아니야...”

나는 그대로 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린 왕자는 다시금 대꾸했다.

“...물론이지. 모래 위 내 발자국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봐. 거기서 날 기다리면 돼. 내가 오늘 밤 그리로 갈게.”

나는 담에서 20미터쯤 거리에 있었고 여전히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말했다.

“좋은 독이 있다고? 틀림없이 날 오래 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나는 가슴이 죄여와 우뚝 멈춰 섰다. 여전히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그만 가 봐.” 그가 말했다. “난 내려갈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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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는 담 밑으로 시선을 내려뜨리고는 그만 기겁해 펄쩍 뛰었다! 그곳엔, 삼십 초 안에 당신 목숨을 끝장낼 만한 노란 뱀들 가운데 하나가 어린 왕자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권총을 꺼내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며 달려갔지만, 뱀은 내 발자국 소리에 모래 속으로 스르르 물줄기가 잦아들 듯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가벼운 금속음을 내며 조금도 허둥대지 않고 돌 틈새로 구불구불 교묘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담 밑에 이르러서야 눈처럼 창백해진 내 작은 왕자를 간신히 품에 받아 안을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젠 뱀들하고 이야기를 하는구나!”

나는 그가 한결같이 목에 두르는 금빛 목도리를 풀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물을 적셔 주고는 물을 마시게 했다. 이제 그에게 뭐라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심각하게 바라보더니 내 목에 제 두 팔을 감았다. 카빈총에 맞아 죽어가는 새처럼 그의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아저씨가 기계 고장을 해결하게 되어서 기뻐요. 아저씬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네...”

“어떻게 알았지!”

우연찮게 기계를 고치는 데 성공했다고,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알려 주러 왔던 참이었다.

그는 내 의문에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도 오늘 집으로 돌아가요...”

그러고 나선 쓸쓸히,

“훨씬 더 멀고... 훨씬 더 어려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아기인 양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럼에도 내가 붙잡을 수 없는 깊은 구렁 속으로 그가 곧장 녹아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득한 곳을 바라보듯 매우 심각한 눈빛이었다.

“나에겐 아저씨가 준 양이 있어요. 그리고 양의 상자도 있죠. 입마개도 있고...”

그가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한참을 기다렸다. 그의 몸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얘야, 무서웠겠구나...”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저녁이 훨씬 더 무서울 텐데...”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 탓에 나는 다시금 오싹해졌다. 이 웃음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견딜 수 없는 일임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 웃음소리는 내게 사막의 샘과도 같은 것이었다.

“얘야, 난 너의 웃음소리를 또 듣고 싶단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밤으로 꼭 일 년이에요. 내 별은 내가 작년에 떨어져 내린 곳 바로 그 위에 뜨게 될 거고요...”

“얘야, 뱀이니 만날 약속이니 별이니 하는 이야기는 그저 몹쓸 꿈 아니겠니...”

그러나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렇고말고...”

“꽃도 마찬가지죠. 어느 별에 사는 꽃 한 송이를 사랑한다면 밤에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감미로울 거예요. 별들마다 모두 꽃이 필 테니까.”

“아무렴...”

“물도 마찬가지야. 아저씨가 내게 마시라고 준 물은 음악 같았어요. 도르래와 밧줄 덕분에... 기억하죠? 참 좋았어요.”

“그랬지...”

“아저씨는 밤이면 별들을 바라보겠지. 내 별이 워낙 작아서 어디 있는지 지금 가르쳐 줄 수가 없네. 차라리 잘됐지 뭐. 내 별이 아저씨한테는 여러 별들 중 하나가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모든 별을, 아저씨는 걔네를 바라보는 일이 좋을 테고... 별들 모두 아저씨 친구겠네. 그리고 나 아저씨한테 선물을 하나 할까 해...”

그가 다시 웃었다.

“아! 얘야, 얘야, 난 이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

“바로 그게 내 선물이지... 물도 마찬가지고...”

“어째서 그렇지?”

“사람마다 별이 있지만 다 똑같은 별은 아니에요. 여행하는 사람에게 별은 길잡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그저 조그만 빛일 뿐이고. 학자들에게는 연구 대상일 테죠. 내가 만난 사업가에겐 별이 황금이었어. 하지만 별들은 모두 말이 없어요. 아저씬 다른 사람은 갖지 못한 별을 갖게 되겠지...”

“어째서 그렇지?”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 내가 그들 중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것들 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 거니까, 그럼 아저씨한테는 모든 별들이 웃는 것처럼 보일 테지. 아저씬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갖게 됐네!”

그가 또 웃었다.

“그리고 아저씨의 슬픔이 가셨을 때 (슬픔이야 언제고 가시게 마련이니까) 나를 알았다는 걸 기뻐하게 되겠지. 아저씬 언제까지나 내 친구일 테고. 나랑 같이 웃고 싶어 하겠지. 그래서 이따금 그저 재미삼아 창문을 열게 될 거야... 그럼 아저씨 친구들은 아저씨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을 보고 꽤나 놀랄 테지. 그럼 걔네한테 이렇게 말해줘요. '그래, 난 별들을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나와!' 아저씨가 미쳤다고 생각하겠군. 내가 아저씨에게 못할 짓을 했네...”

그리고는 또 웃었다.

“별들 대신에 웃을 줄 아는 조그만 방울들을 내가 아저씨에게 잔뜩 준 셈이 됐어...”

그리고는 그가 또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심각한 기색이 되었다.

“오늘밤은... 말이지... 오지 마요.”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내가 아픈 것처럼 보일 텐데... 죽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그러기 마련이거든. 보러 오지 마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는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뱀 때문이기도 해요. 녀석이 아저씨를 물면 안 되니까... 뱀은 사나워요. 그냥 장난삼아 물지도 모르고...”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가 안심하는 듯했다.

“하긴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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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그가 길을 떠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는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그를 따라잡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잰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 아저씨 왔네...”

그리고 그가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또 다시 걱정스러워했다.

“아저씨가 잘못한 거야. 마음이 아플 거야. 나는 죽은 것처럼 보일 테지만, 사실 그게 아닌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도 알잖아. 거긴 너무 멀어요. 이 몸뚱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어. 너무 무거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벗어버린 낡은 껍데기 같을 거예요. 낡은 껍데기가 슬픈 건 없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다시 기운을 냈다.

“근사하겠다. 나도 별들을 바라볼 테야. 별이란 별은 모두 녹슨 도르래가 있는 우물로 보일 테지. 별들이 모두 나한테 마실 물을 부어줄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재밌겠다! 아저씬 작은 방울들 오억 개를 갖게 되고, 난 샘물을 오억 개 갖게 되는 거네...”

그리고 그도 입을 꾹 다물었다. 울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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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야. 나 혼자서 한 발짝만 가게 놔둬요.”

그러더니 그가 주저앉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있잖아... 내 꽃... 나 그 꽃한테 책임이 있어요! 그리고 그 꽃은 몹시 연약하단 말이죠! 너무 순진해. 고작해야 가시 네 개를 갖고서는 세상에 맞서 자기를 지키겠다니...”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주저앉았다. 그가 말했다.

“봐요... 이게 다야...”

그는 또 조금 망설이더니 다시 일어섰다. 그가 한 발짝 내디뎠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발목께 노란 빛 한줄기가 반짝했을 뿐이었다. 그는 한순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그는 나무가 쓰러지듯 천천히 쓰러졌다. 모래사막이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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