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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귀니 Dec 26. 2023

나만의 속도로 내 길을 가도 충분히 괜찮은 것을

고장 난 엘리베이터는 내 친구

한의원 치료 마치고 돌아오는 중 청천벽력 같은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온 ‘점검 중’이라는 빨간 불.     


아뿔싸 큰일 났구나. 우리 집은 20층인데 이걸 어떡한담?     


허리디스크로 한의원 치료 다녀오는 사람에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대략적인 수리 시간을 알고 싶어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수리 기사님을 불렀지만 예상 소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수리 기사님이 오셔서 엘리베이터를 고치면 혹시나 20층까지 걸어가야 하는 불상사는 면하지 않을까 싶어 기사님이 오시는데 소요되는 시간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했다. 확인 후 전화 준다고 했지만 한참 동안 연락이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내가 전화를 했더니 기사님이 통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통화 안 된다는 말이라도 전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려고?’     


분노가 쌓였지만 관리사무소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걸어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엉치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서 휴식하고 다시 오르기를 반복해야 했다.

한참을 올라가고 있는데 관리사무소에서 또다시 전화가 왔다.     


“오시는데 한참 걸린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미 다 내려놓고 계단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이라 약간은 신경질적인 말투로 끊었다. 겨우겨우 20층에 도착했다. 어찌어찌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윽! 엉치 아파!’     


역시나 계단을 20층까지 오르는 건 아직 내게 무리였던 것이다.     

아침 식사 시간에 전날 있었던 일을 하소연했다.     


“수리 기사님이랑 연락이 안 되면 그 말이라도 빨리 해 줘야지. 추운데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랐지만 내가 원하는 답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공동주택에서 이해하며 살아야지. 그게 관리사무소 잘못도 아니고.”     


아빠가 선비처럼 말씀하셨다.     

사실 나도 엉뚱한데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 편 좀 들어주면 안 돼? 나도 다 안다고.”       


35세 출가외인 답지 않게 툴툴거렸다.     


“아빠는 우리 딸이 행복하길 바라거든.”     


이럴 수가! 이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다니!     


아기를 낳고 다리를 절뚝이며 한방병원에 입원했었다. 금방 퇴원할 줄 알았지만 4주를 입원했음에도 아직 내 통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천천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에 인내가 필요하다.


그땐 평지를 걷는 것조차 힘들어 절뚝거렸지만 이제는 무려 20층이나 계단으로 올라왔네. 점점 살아나는데?     


나도 모르는 새 천천히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엉치뼈가 아프니 화가 났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쉬었다가 올라가야 하니 답답했다. 아무도 내게 집에 빨리 오라 한 사람이 없었음에도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건 내 마음의 영역이다.     


천천히, 조금씩, 쉬기도 하면서 나만의 속도로 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가 서두르지 말라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친구같이 느껴진다.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아빠의 말 한마디에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     


“고마워요, 아빠.”     

“고마워, 고장 난 엘리베이터야. 너도 매일 사람들을 실어 나르느라 힘들지? 나도 이곳저곳 관절이 아파서 힘들어. 그래도 우리 살살 달래가면서 같이 잘살아보자.”     


행복의 길은 내 안에 있음을 이렇게 또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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