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 시답지 않은 시 2
젖은 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그가 왔다
누가 볼세라 황급히 창문을 닫고 두꺼운 커튼을 친다
열어준 적 없는 문을 통해 신발을 신은 채로
무례한 그가 들어온다
한 줄기 빛도 허락되지 않은 검은 방들을 지나
소파 위로 상심한 그가 가라앉는다
그를 껴안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내가 서성인다
그가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날 선 두려움을
가방에 쑤셔 넣고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여전히 미동도 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
초대한 적 없는 그를 보낼 방법은 언제나 유일하다
발치에 앉아 얼굴을 덮고 있는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구멍 두 개를 들여다 본다
그의 정수리, 떨리는 손끝, 시퍼렇게 멍든 발가락
나와 똑 닮은 그, 다시 찾아 온 나의 우울과 마주 한다
커튼을 젖히고 젖은 옷을 햇살에 널어놓고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신발을 씻어 말린다
햇살에 바싹 부풀어 오른 옷을 입고서야
그는 떠날 것이다
지금처럼 온몸이 젖은 체로 불쑥 나에게로 올
나의 그,
그가 오늘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