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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타스틱' 그대들

꿈꿔왔던 모든 것

by 펜 끝

내게 '오직 하나뿐인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한둘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대부터 찾는다. 얼른 뜨겁게 입 맞추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한다. 드디어 두 손에 그대를 꼭 감싸고 깊게 입을 맞춘다. 한 번의 입맞춤으로 눈이 번쩍 뜨이고 하루를 살아낼 용기를 주는 쌉싸름한 그대는 '커피'이다.


손가락만 갖다 대도 활짝 문을 열어 반겨주는 그대가 있다. 출근을 위해 지문을 갖다 댈 때마다 설렌다. 이십여 년 넘게 바람 한번 피우지 않고 서로만 바라보고, 잘하든 못하든 함께했다. 궁색했던 여정도 있었지만,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매불망 너밖에 없다고 속삭이지도 않았다. 고맙게도 나의 주머니 사정을 가장 걱정해 주는 마음 여린 그대는 '나의 일'이다.


일과를 마치고 나름의 격식을 갖춰 만나야 할 그대가 있다. 이름에 걸맞은 잔을 꺼내놓고 어울릴만한 음식을 준비한다. 목이 긴 잔에 솜사탕 같은 거품이 차오른다. 사라질세라 얼른 그 몽글몽글한 거품을 보란 듯이 입술에 묻힌 채로 도도하고 차가운 그대, '맥주 한 잔'을 마신다.


늦은 밤, 가장 나를 애끓게 만드는 그대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파르르 떨며 품속으로 파고든다. 늘 조곤조곤 속삭이는 수줍음 많은 뽀얀 그대들이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애간장을 녹이는 그대, '책'이다.


말 안 하고 넘어가면 섭섭해할 그대가 있다. 첫사랑, 두 번째 사랑.... 그렇게 다섯 번째 손가락을 접을 때쯤 그이를 만났다. 그리고 말했다. "다섯 번째 접은 손가락이 알고 보니 엄지였다"고 설레발을 쳤었다. "나한테는 당신이 첫 번째 손가락이었는데"라고 그이가 말한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얀 거짓말을 한다. 누구나 순백의 드레스 위에 새하얀 거짓말을 부케처럼 들고 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 아니겠는가. 그대들 중의 엄지척은 당신이었다는 내 말에 안도하며 잠을 청한다. '순진한 엄지'가 잠결에 이를 간다. 꿈속에서 속았단 걸 알았나 보다. 나의 '오랜 그대'는 다행히도 질투를 모른다.


그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은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 새침한 그대 '글쓰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가끔 몰래 담을 넘어 찾아오는 멋들어진 연미복을 입은 까치처럼, 언젠가는 기꺼이 나의 뜨거운 그대가 되어줄 것이다.


어쩌면, 간절히 꿈꿔왔던 일들이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의 '그대'가 되어 와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일은 또 어떤 그대가 살금살금 등 뒤로 다가와 껴안아 줄까. 매일의 데이트가 기다려진다. 나의 '환상적인 그대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그대'가 되어주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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