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처럼만 살지 않으려면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
흙 위의 볼록하게 솟은 작은 구멍 하나, 마치 누군가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듯한 비밀의 문으로 쉴 새 없이 들어가고 있다. 줄을 맞춰 행진하듯 들어간다. 저 구멍 속 세상이 궁금했다.
쪼그리고 앉아 행렬을 구경했다. 그들은 빈손이 아니다. 뭔가를 이고 지고 열심히도 나른다. 이렇게 커다란 내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본체만체한다. 너무 큰 존재는 있으나 마나인가 보다.
슬그머니 옆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가늘고 긴 게 딱 안성맞춤이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 아무리 궁금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숨까지 멈추고 그 구멍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서 가지를 쏙 찔러 넣으려 했다.
그 순간 가지 끝에 개미 한 마리가 딸려 올라왔다. 원래 가려던 길이었다는 듯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털어내지도 못하고, 마음이 약해져서 들고 있던 가지를 옆으로 눕혀 들었다. 나를 봤나 보다. 아니, 냄새를 맡은 거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흠칫 멈춰서서 날 빤히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이 상황이 낯설지가 않다.
아이가 어렸을 때 물었었다.
"엄마는 왜 맨날 일만 해? 일이 나보다 좋아?"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해줄 만한 대답은 더구나 아니었다. 솔직히, 나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냥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다들 열심히 사니까. 개미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이제야 그 대답이 알고 싶어졌다. 어쩌다 인간의 본보기가 되어버린 그 개미에게 물었다. 행여 입바람에 날아갈까 봐 눈으로 간절함을 표현했다.
"넌 왜 그렇게 열심히 사니? 왜 모두 널 닮으라고 하는 걸까? 넌 개미이고 난 사람인데 말이야."
관찰이 연민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개미는 없다. 함께 집을 짓고, 알을 보살피고 한 마리도 빠짐없이 제 할 일을 한다. 집으로 뭔가를 물고 들어가는 행렬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 마리가 길을 뚫고, 다른 하나는 뒤에서 받치고, 너무 무거우면 여럿이 힘을 합쳐 옮긴다. 소리도 불평도 없다. 그저 '해야 하니까' 한다.
개미는 그게 운명일 수 있지만, 나는 인간인데, 왜 내 삶의 방향을 묻지 않았을까. 내 안에서 무언가가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개미를 죽이려다, 오히려 살아난 건 나인지 모른다. 개미는 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개미를 본다. 아니, 내 안의 개미를 본다. 쉴 새 없이 일하는 나 역시 그런 존재가 아닌가. 아침이면 구멍에서 나와서 뭐라도 물고 들어가 자식을 키우고 식량을 저장하고 집을 가꾼다. 그게 삶의 전부인 줄 알았다.
개미는 길을 잃지 않는다. 설령 길을 잃는다 해도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서로의 몸에서 나는 냄새인 ‘페로몬’을 따라간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하게 남긴 흔적만으로도, 그들은 방향을 알고 속도를 조절하고 위험을 감지한다. 그렇다면 인간인 나는 무엇을 따라 여기까지 온 걸까?
개미와 인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개미는 ‘질서’를 위해 산다. 단 한 마리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질서 속에서 자유를 꿈꾸고, 일상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우리에겐 “왜 사는가?”를 묻는 자의식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인간은 ‘개미처럼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개미처럼 살지 않기 위해 질문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개미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인간이기에 그 단순한 명제에 질문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는가?"
"그 길 끝에서 무엇을 보고 싶은가?"
내 안의 개미가 그 답을 찾으러, 막 집을 나서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