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찰 (블랙) 코미디 에세이 「방송국 놈들」
방송국 놈은 두 놈으로 나뉜다. 그냥 하는 놈과 즐기는 놈. 고되지만 재밌는 일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방송국에는 꿈을 찾아 날아든 일꾼이 많을 것이라는 오해가 더러 있다. 하지만 막상 방송국에서 일을 해보면, 그냥 하는 놈이 절반 이상이오, 즐기는 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공에 맞춰 자연스럽게 흘러온 프리랜서 피디가 절반이고, 아는 언니의 권유로 일을 시작하다 보니 지금까지 한 작가가 절반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오작가는 명확히 후자였다. 그녀는 즐기는 놈이었다. 내가 그녀의 정체를 깨달은 곳은 회의실이 아닌 한 술집이었다.
“노래 맞추기 할래요?” 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회식자리였다. 처음 만나는 작가 열댓 명과 피디 열댓 명이 모였다. 어색함 반, 흥겨움 반으로 채운 공기 아래, 사람들은 회전목마에 탑승한 듯 테이블 3개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축이 돌아 오작가가 내가 있는 테이블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냥 마시면 재미없잖아. 노래 전주 듣고 노래 제목 맞추기 어때요?” 그녀의 제안은 해맑고도 이상했다. 누가 예능작가 아니랄까 봐. 여기까지 와서 일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만류가 뒤따랐다. “왜, 나는 친구들이랑 여행 갈 때도 내가 프로그램 짜는데.” 그녀의 해맑은 대사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열띤 설득이 이어졌고, 결국 나는 유튜브를 뒤적이며 문제를 낼 음악을 찾았고, 다른 피디는 술집에서 문제를 낼 종이를 접었다. 난 그때 알았다. 그녀는 이 일을 즐기는 놈이었다, 그것도 많이.
그녀의 열정은 오디션이 진행되는 내내 뜨겁게 타올랐다. 오디션에서 작가의 주 업무는 참가자 케어다. 일반인 참가자들의 캐릭터를 분석하고, 그들의 심경 변화를 잘 캐치하는 게 작가의 업무였다. 오작가는 업무에 충실했다, 그것도 많이. 참가자들의 고민을 3시간이 넘도록 들어주던 그녀는, 그들의 무대 의상을 정하기 위해 동대문에 직접 발품을 팔기도 했다. 그녀에게 단순히 ‘열심히’ 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즐기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오디션이 끝난 이후에도 그 오디션의 스핀오프, 오디션 우승자의 데뷔쇼케이스까지 담당하며 해당 오디션 프로의 유일무이한 전담 작가가 되었다. 다른 작가들이 모두 교체되는 순간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그녀를 보며 ‘즐기는 놈은 아무도 못 이긴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부러웠다.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그녀는 아마 대한민국 1% 안에 드는 행운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그녀를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건 스핀오프가 끝나고, 데뷔쇼케이스를 위한 작가진을 모집할 때였다.
오작가의 후배 작가를 뽑는 자리였다. 메인 피디는 고민이 많았다. 촬영 소스도 부족하고, 인지도도 적었다. 이런 데뷔쇼케이를 하고 싶어 할 작가가 있을는지 걱정이 앞섰다. 그때 뱉은 오작가의 말이 내 뇌리에 꽂혔다.
“그래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을 뽑아야죠.”
즐기는 놈이 아닌, 즐길 줄 아는 놈. 어느 상황에도 즐기는 법을 아는 놈. 즐기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놈. 그놈이 즐기는 놈보다 더 센 놈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명언을 던지고는 해맑게 웃는 오작가였다. 오작가는 내가 본 방송국의 놈, 놈, 놈 중 가장 센 놈이었다. 즐기는 놈 위, 즐길 줄 아는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