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5 돌아온 유부녀, 최피디.

인간 관찰 (블랙) 코미디 에세이 「방송국 놈들」

by 펜피디

오전 9시 40분. 아직 잠이 덜 깬 사무실에 타닥거리는 타이핑 소리만 들려올 때. “대표님.” 그 정적을 깬 건 최피디의 목소리였다. “네, 대표님. 아니, 나도 답답해 죽겠다니까요?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억척스러운 목소리에 문득문득 엄마 같은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어휴, 역시 대표님이야. 네 감사해요.”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 최피디는 해맑게 전화를 끊었다.


최피디는 돌아온 유부녀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 이른바 ‘돌아온 유부녀’. 한때 편집기를 잡는 제작 피디였던 그녀는 돌아와 사업피디로 직무를 바꿨다. 이제 그녀는 날밤 새울 체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허락된 자리는 사업 파트 자리뿐이었다. 이건 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이지.


편집기를 잡듯 전화기를 집어 든 그녀의 기술은 2+2 법칙을 따랐다.

첫 번째, 공감하고 사과하기.

“그니까. 다들 일을 아주 막 하는 거지 아주. 나도 그 마음 알아요. 내가 잘못한 건 아닌데 암튼 미안해요.”

최피디의 깊은 공감에 영혼 저 아래까지 위로받은 상대는 그녀의 사과에 얼버무리고 만다. “그게 뭐 최피디 잘못인가. 됐어. 괜찮아.”

두 번째, 감사하고 부탁하기.

“너무 감사해요. 역시 실장님은 해주실 줄 알았다니까. 내가 늘 감사해요. 그런데 그 9월달 촬영도 좀 봐주시면 안 되나?”

최피디의 감사인사에 비행기를 타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는 다음 부탁도 들어주게 되어있다. 그녀는 아무리 어려운 상대와도 밝은 얼굴로 전화를 마무리 지었다. 협찬사며, 유관부서며 어르고 달래는 최피디가 설득하지 못할 자는 없었다. 딱 한 명 빼고.


띠리리. 개인 핸드폰이 울어댔다. 최피디는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터트렸다. 불길하다.

“현진아, 이번 달까지는 수학 학원 가기로 했잖아.”

전화의 상대는 그녀의 아들이었다.

“엄마랑 약속한 거잖아. 이번에 가면 엄마가…”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이놈 시끼가, 학원 안 가기만 해봐.”

뚝. 그렇게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인자하던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구겨졌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안정을 되찾았는지 다시 회사 전화를 들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아, 오랜만이에요.”


최피디, 그녀가 설득 못 할 상대는 없었다.

그녀의 아들을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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