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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필피 Sep 08. 2024

김해준(3)

깨진 창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도덕이며 규범이며 법이니까.


열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해준의 학급 번호는 3번에서 7번 사이었다. 50명을 일렬로 쭉 세워 키 순서대로 번호를 할당했다. 해준의 신장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도 작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도 작았으며, 중학교에 다닐 때도 내내 작았다.


희멀건 피부와 왜소한 골격은 어떻게 보면 쉬운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4학년이 되자 슬슬 그런 기미가 나타났다. 눈꼬리가 올라간 짝꿍이 책상에 줄을 그었는데 해준의 자리는 두 뼘만 주고, 자기 자리는 다섯 뼘이나 가져갔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지만 그어진 줄을 넘어가면 뒤통수를 때리는 벌칙을 받았고, 수업을 위해 펼친 교과서가 두 뼘보다는 더 컸기에 시도 때도 없이 맞았다.


체급이 다르니 겨룰 수 없었다. 키 차이보다는 살집의 격차였다. 해준은 볼품없이 삐쩍 말랐으며, 짝꿍은 볼썽사납게 과체중을 넘은 비만이었다. 체질량지수로 따지자면 해준은 BMI가 17이었고 짝꿍은 33였다. 양극단에 선 두 아이가 짝지가 된 건 순전히 키가 비슷해서였다.


동의한 적 없는 벌칙은 하루가 멀다고 이어졌고, 해준도 이제 반격해야 할 시기가 왔단 걸 직감하였다. 이대로 놓아두면 짝꿍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십중팔구 자기를 괴롭힐 터였다.


깨어진 창문 이론.


이 이론은 작은 무질서와 가벼운 법 위반이 방치되면 결국 더 심각한 범죄와 사회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본 개념은 이러했다. 예를 들어, 한 건물의 창문이 깨져있고 이를 수리하지 않고 장기간 방치한다면 사람들은 그 건물이 관리되지 않고 있다고 짐작한다. 그 결과 같은 건물의 다른 멀쩡한 창문을 깨고 그 건물 자체를 훼손하는 것에 괘념치 않게 된다.


마치 한 장소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데 이를 치우지 않고 내버려 두면, 결국 그곳은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곳이라고 사람들이 인식해 버리고 다들 그곳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쓰레기를 버리게 되는 현상 같은 거….   

이 이론에 따르면 짝꿍이 해준에게 가하는 폭력은 깨어진 창문 이론에서 말하는 첫 번째 창문이 깨어진 것과 유사했다. 이대로 놔두면 그 행동이 용인될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반 아이들 전체에게 심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해준은 생각했다. 즉각적이고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담임 선생한테 도움을 요청할까? 어머니께 상황을 알릴까? 먼 곳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에 빠졌던 해준의 뇌리에 노란불이 켜졌다. 경고를 뜻하는 옐로카드였다.

어른이 끼어든다고 해결되는 방식은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이야.

오히려 날 약한 놈으로 보이게끔 할 거고.

가게 일로 바쁜 어머니가 매번 나를 위해 학교로 달려와 주실 순 없잖아.

어머니의 어깨에 짐을 얹지 마. 그건 아주 불효라고.

담임은?

5학년이 되면 담임이 바뀌잖아. 그때도 또 도와달라고 할 거야?

아주 고자질쟁이가 체질인가?

반 아이들이 과연 입 싼 녀석을 좋아할까?

아니. 결단코.

그러면? 그러면 나 같은 약체는 어떻게 하면 되는데?


해준의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깨어진 창문을 건물에서 아예 들어내 버림으로써 괴롭힘을 조장하는 시그널을 걷어내기. 둘은 다른 건물에 있는 창문을 더욱 심각하게 훼손해 무질서가 그 건물에 몰려들게끔 주의를 전환하기.


첫 번째 방식은 짝꿍을 없애거나 혹은 해준이 이 반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타인을 해치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피해자가 사라져야 하나? 이것도 답은 아니다. 서울에서 통영으로 이사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모자가 힘을 합쳐 현재의 삶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전학이 가당키나 할까. 해준은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게다가 이 방법은 보호자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니 노 노.


첫 번째 방식이 아니라면 유효한 건 두 번째 방법. 해준은 ‘다른 건물’이 될 아이로 짝꿍을 찍었다. 해준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반 친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괴롭힘에는 괴롭힘이 제격이리라.


자, 그러면 걜 어떻게 괴롭혀 볼까?

내가 스스로?

맨몸으로 부딪히는 건 불가능.

체급 차이만큼이나 신나게 얻어터질 게 안 봐도 비디오.

그럼?

도구를 사용해? 무기를 들까?

커터칼? 깨진 병?

확 찔러 버려?

아니야. 소문만 나빠질 거야. 미친놈이라고.

나는 절대 가해자가 되어선 안 돼.

그러면 어머니가 슬퍼하실 테니까.

해준은 옆 반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정무야.”


교실 뒤에서 우유 팩 차기를 하며 놀고 있던 현정무가 해준을 발견했다.


“어? 와?”

“교과서를 안 가지고 와서. 도덕책 있어?”

“있지. 내는 서랍에 다 쑤셔 넣고 다닌다 아니가. 와? 안 가꼬 왔나? 내 꺼 빌리 주까?”

“응.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게.”

“니 쪼대로 해라. 어차피 드럽다.”


현정무는 자기 자리로 뛰어가 서랍에 있는 걸 다 끄집어냈다. ‘도덕’이라고 적혀 있어야 하는 책은 ‘도날드덕’이라고 적혀 있었다.


해준과 정무는 학교 친구이기 전에 동네 친구였다. 그리고 동네 친구이기 전 둘은 각자가 엄마 친구의 아들이었다. 해준의 모친 권혜자가 친정어머니께 물려받은 미용실은 항남동에 위치했다. 다방, 술집, 룸살롱, 나이트클럽이 구석구석 박혀있는 통영의 번화가였다. 권혜자가 가위를 든 미용실에 주로 방문하는 고객은 다방, 술집, 룸살롱에 출근하는 아가씨들이었고, 그 아가씨 중 한 명이 현정무의 모친 현지영이었다.


권혜자의 업무는 대개 오후 4시부터 바빠져서 밤 10시가 되면 슬슬 한가해졌고, 현지영은 오후 5시쯤 권혜자의 미용실에 들러 화장과 머리를 하고 룸살롱에 갔다가 주로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일과였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통영으로 어쩌다 흘러 늘어온 외지인인 현지영은 권혜자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둘은 마침 동갑이었고, 둘의 아들도 서로 동갑이었다. 우연이 겹친 공통점은 그들의 만남을 마치 운명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게다가 통영으로 이사 온 시기도 엇비슷했기에 서로 의지하며 적응해 나갔다.


월화수목금토일 매일 저녁밥을 함께 먹는 김해준과 현정무는 의형제나 마찬가지였다.


“빌려줘서 고마워.”

“뭐라카노.”

“나중에 점심 먹으러 우리 반으로 올래? 엄마가 오늘 반찬 돈가스 싸줬는데 같이 먹자. 너랑 나눠 먹으라고 충분하게 싸주셨어.”

“아따아! 어무이! 아랏따. 한 시간 뒤에 보자.”


자기 반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 해준은 책상 위에 도덕 교과서를 활짝 펼쳐 놓았다. 책을 놓을 수 있는 면적이 두 뼘밖에 되지 않는 까닭에 당연히 짝꿍이 그어놓은 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수업이 시작되었고, 짝꿍은 기다렸다는 듯이 연필을 쥐고 교과서의 하얀 여백에 낙서하기 시작하였다. 해골을 그리고, 똥과 털 난 고추를 그리고, 성에 관해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한 초등학교 고학년 남자 아이들이 무분별하게 내뱉는 음란한 단어를 갈겨 적었다. 해준은 개의치 않고 멋대로 하도록 놔두었다. 낙서는 45분 내내 이어졌다. ‘그라게 치아라고 했제 병신아’, ‘38선 넘지마라니까’라는 글귀를 흑심으로 꾹꾹 눌러 적으며 실실 쪼갰다.


졸음이 쏟아지는 도덕 수업이 끝났다. 담임 선생이 앞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뒤통수로 두툼한 살집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해준의 얼굴이 책상 위에 처박혔다. 해준은 교과서를 아예 짝꿍 쪽으로 확 밀쳐버렸다. 짝꿍은 신이 난 표정으로 연필 자루를 꽉 쥐었다. “도날드덕?” 표지를 본 짝꿍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도’를 ‘똥’으로 바꾸고 ‘덕’을 ‘떡’으로 바꾸었다.


어떤 부분이 그리도 재밌는지 사방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현정무가 도착하는 시각에 맞춰 조금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다. 해준은 일부러 오른손으로 짝꿍의 책상을 짚고 쓰러졌던 상체를 일으켰다.


“넘어오지 말라꼬 캤제? 이 말라비틀어진 멸치 시키야.”


짝꿍이 해준의 가냘픈 팔목을 거머잡고 손가락을 하나씩 꺾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타이밍 좋게 현정무가 뒷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쭈나! 밥 묵자!”


웃음소리를 관통하며 들어온 외침은 천장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소란이 멈추고 이내 적막이 흘렀다.


“시방 뭐하는 기고?” 심상치 않은 상황에 현정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쭈나? 인마 머꼬?” 하고 짝꿍의 목덜미를 휘어잡았다.


“어, 어…? 시발. 놔라!”

“머라카노? 니나 놔라, 쭈니. …어 머꼬? 이거 내 책 아이가?”


잔뜩 구겨진 책의 교과목은 ‘똥날드떡’이었다.


“언놈이 이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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