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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필피 Sep 09. 2024

김해준(4)

해준의 방식

“언놈이 이랬노?”


해준의 말간 눈은 그저 현정무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자로 다물린 해준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쭌이 이런 짓할 새끼는 아니제. 씨발. 니가 했네. 야, 돼지비계. 땀 삐질삐질 흘리면 다가?”


현정무는 평범한 체격이었다. 학급 번호도 중간. BMI도 보기에 딱 좋은 표준. 평상시엔 헤벌쭉 입을 벌리고 반 친구들과 우유 팩을 차며 노느라 정신이 팔린 평범한 열한 살이지만 꼭지가 돌아버리면 인정사정 봐주는 게 없는 영화 속 건달같이 180도 돌변했다.


현 씨네 모자는 룸살롱 업주가 마련해준 다중주택에서 지냈다. 일반적인 단독주택을 기숙사처럼 변경하여 타지에서 온 직원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식이었다. 주택에는 미혼모가 북적였고, 그곳에 사는 아이들 대부분은 현정무보다 나이가 네댓 살 많은 형이나 누나들이었다. 자신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등신 취급 받기 십상이라 나이가 어린 만큼 ‘누구든 건드리면 죽여버린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는 환경이었다.


삼백안이 희번덕였다. 현정무는 거머쥔 목덜미를 내리누르는 동시에 딱딱한 무릎을 치들어 상대의 코를 퍽, 소리가 나게 찧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해준의 짝꿍은 반격은커녕 방어도 못 한 채 교실 바닥을 나뒹굴었다. 코피가 줄줄 흘러 나무 마루에 뚝뚝 떨어졌다. 이를 구경하던 반 아이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아니, 감히 그러지 못하였다. 간간이 코피가 숨구멍으로 잘못 흘러 내려가 “컥, 컥, 크.”하는 앓는 소리만이 맴돌 뿐이다.


“이 시발노마, 누가 이 행님 책에 낙서하라데?”

“크, 큭…!”

“이거 정신이 획까닥 간 놈 아이가? 니 내 눈지 모르제?”

“으윽….”

“모를끼다. 그런데 오늘부로 알게 될끼다.”


무자비한 폭행이 잇따랐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눈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려버리는 지경까지 치달았다. 백기를 흔드는 패배자의 배에 올라탄 현정무는 모서리가 뭉툭하게 찌그러질 때까지 도덕책으로 상대의 이마를 후벼파듯 내리찍었다. 붉은 선혈이 주변으로 마구 튀었다. 몇몇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개중에 한둘은 담임을 찾아 2층 교무실로 향하는 것도 같았다.


“까불지 마라. 어? 어!”

“….”

“존만한 기.”

“….”


살벌했다. 해준의 손가락을 꺾은 데에 대한 복수인지, 도덕책에 낙서한 데에 대한 응징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준이 “그만해.”라며 어깨에 손을 올리자 현정무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고 꽉 말아쥔 주먹에서 퍼뜩 힘을 풀었다.


“여기서 몬 묵겠네. 쭈나, 나가서 묵자. 가자.”

“응, 그래.”


그 후로 짝꿍은 해준을 건드리지 않았다. 책상 위 2대 5 비율로 그어진 줄도 사라졌다. 친구를 곤죽으로 만든 벌로 엎드려뻗쳐에 매질을 쉰 대나 받은 현정무는 엉덩이에 피떡이 졌지만, 또 다음날부터 우유 팩을 차며 놀았다.


도덕책 사건을 직접 목격한 아이들과 사건을 입으로 전해 들은 4학년 아이들의 머릿속에 두 가지 주의점이 새겨졌다. 하나는, 헤헤거리며 성격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현정무는 건드리면 안 된다. 둘은, 현정무와 김해준이 친하다. 그러니까 해준이도 건드리면 안 된다.


그렇게 모든 건 해준이 계획한 대로였다. 해준은 현정무가 자발적으로 짝꿍을 패주길 바랐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정무는 발 벗고 나서줄 위인이었다. 한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도움을 청하고 들어주는 순간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빚을 지게 되는 것이고, 나중에 언젠가는 그 빚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갚아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빚이 약점이라도 되는 날엔 친구와의 관계가 더 이상 동등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해준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헤아렸고, 가장 안전한 수를 택한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준은 반도에 있는 인평중학교에 입학했다. 섬에 세워진 미륵남자중학교로 진학한 현정무와는 일시적인 작별을 고해야 했다.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는 거주지와 상관없이 배정되었다. 100퍼센트 뽑기였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의 성장 속도는 상당히 가팔랐다. 이차 성징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다들 하루가 멀다고 남성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해준은 여전히 작고 여린 소년이었다. 초등학교보다 거친 중학교의 생태계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친 권혜자를 비롯한 미용실 손님들은 하나같이 걱정에 가슴을 졸였지만, 되레 당사자인 해준의 태도는 남 일처럼 덤덤했다.


“3번.”


또 키순서로 학급 번호가 할당되었다.


“나보다 작은 애들이 있더라고요.”

“그래도 큰 아-들이 더 안 많나?”

“그거야 당연하죠. 우리 반이 마흔일곱 명인데. 전 앞에서 3등이잖아요.”


미용실 막내 조안나 형이 모자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원장님, 해준이 태권도 학원 다니게 하입시더.”


조안나는 무척이나 상냥한 형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칼과 떡 벌어진 흉곽. 두꺼운 골격, 커다란 키. 입고 다니는 옷 스타일까지 모든 것이 남성성을 부각하지만 조안나의 말본새나 몸짓은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했다. 형은 미용실 멤버의 유일한 청일점이었다.


“태권도?”

“어차피 공부는 학원에 안 다녀도 쪼매 한다면서예? 태권도나 검도, 이칸 거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꺼?”


권혜자는 “흐음.”하며 턱을 매만졌고, 해준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한 대 맞으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요, 형. 육체전은 영 취미가 아니라서.”

“머시라? 얀마, 니가 지금 취미 따질 때가? 중학교는 국민학교랑 다르데이. 만만하게 보면 큰코다친다 안 카나.”


조안나의 조언이 본인의 쓰디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을 해준은 눈치채고 있었다.


“형. 초등학교요. 이제 초등학교라고 불러요.”

“아, 맞다. 그랬제?”


권혜자는 일부러 해준의 교복을 딱 맞게 맞춰 입혔다. 성장할 것을 고려해서 한 치수 내지 두 치수 크게 입는 게 대세라고 교복점 주인 내외가 오지랖을 부렸지만, 권혜자는 “교복 작아지면 또 맞추러 오면 되지, 별걱정을 다 하요.”라며 사람 좋게 웃으며 거절했다.


“자꾸 오면 우리야 좋제.”

“그럼 와서 또 맞추게 사장님이랑 사모님이 울 머스마 키 좀 크게 빌어 주소.”

“하모하모.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게 아침마다 물 떠 놓고 절해야겠네.”


중학교 신입생이 된 해준은 순조로운 3년을 위해 찬찬히 토석을 다지기로 결심했다. 먼저 미륵남중에 다니는 현정무의 패거리들과 시내에서 어울려 다녔다. 항남동과 가까운 오행당 골목에서 서성이며 좀 논다는 아이들에게 부러 눈도장을 찍었다.


한번은 미륵남중 3학년 일진 무리와 오행당 골목 우동 가게에서 시비가 붙은 적 있었다. 우동 사리를 젓가락으로 휘젓는데 대화 목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며 일진 하나가 현정무 무리가 앉은 테이블로 와 주의를 주었다. 일찍이 룸살롱 기숙사에 사는 고등학생 형·누나들도 다 제쳐버린 현정무는 겁이랄 게 전연 없었다. 정무는 “예, 예, 알겠십니더.” 하며 앞으로 조심하겠다는 투로 대답해 놓고선 3학년 일진이 뒤돌아 자기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발을 걸어 자빠뜨렸다.


이 일로 큰 싸움이 일어났지만 1학년 현정무 무리는 3학년 일진들에게 쉽게 지지 않았다. 결국 패하긴 했어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상태가 온전한 3학년이 없을 지경이었다. 황새들 싸움에 뱁새인 해준이 이바지한 바는 미미했다. 하지만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와중에도 도망치지 않고 현정무와 그의 패거리를 온몸으로 감싸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는 게 중요했다.


발 없는 소문은 옛말처럼 대번에 퍼졌다. 미륵남중뿐 아니라 해준이 다니는 인평중학교에도 닿았다.


“쟈가?”

“슬마.”

“쪼꼬만데?”

“존나게 얻어터졌는데도 도망 안 칫단다.”

“미남중 1학년 현정무라고 알제? 금마 불알친구란다, 점마가.”

“작은 고추가 존나게 매운갑네.”


허벅지에 유리가 박히고 팔뚝 뼈에 금이 갔다. 현정무의 무리가 공격하는 동안 자진해서 몸빵을 담당한 해준은 전치 6주가 나왔다. 해준은 이틀 병원에 입원했다가 귀가하였고, 석고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등교했다. 소문이 진짜라는 걸 구태여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3학년과 붙은 1학년.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1학년 동급생 중에서는 해준을 만만하게 볼 자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문제는 상급생인 2학년이나 3학년인데, 해준은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도 다 계획이 있었다.


“니가 김해준이가?”

“예, 선배님.”

“니가 저기 미남중 1학년 현정무랑 친구가?”

“예, 선배님.”

“미남중 3학년이랑 싸울 때 니도 거기 있었다매?”

“예, 선배님.”

“우리는 미남중 빌빌이들이랑 다르데이. 니 기어오르면 전치 6주에서 안 끝난데이.”

“안분지족(安分知足)입니다, 선배님.”


한문시간에 배운 사자성어였다.


“어? 안분, …뭐? 그게 머꼬?”

“제 분수를 잘 안다는 뜻입니다, 선배님.”


뻣뻣한 막대기는 부러지기 마련이다. 때로는 갈대처럼 바짝 엎드리는 게 답이 될 때도 있다. 어차피 1학년과 2~3학년은 다른 건물을 사용했고, 하여 부딪칠 일은 드물었다. 그러니 같은 1학년에게만 건드려선 안 될 놈으로 통하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해준은 종종 상급생 일진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1학년에게 보였다. 그럼으로써 순탄한 1학년 생활을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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