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터널
먹구름이 몰려왔다.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가늘고 하얀 빗금을 그리며 아스팔트 바닥에 내리꽂혔다. 주연은 해저터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귀의 주둥이처럼 벌어진 입구는 그때처럼 컴컴했다. 주연이 기억하기론 하준희를 처음 만난 그날도 이렇게 비가 왔다. 하지만 장맛비는 아니었고, 벚꽃잎을 실어 나르던 봄비였다.
2학년 2학기 기말시험을 치르고 자퇴한 주연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독립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수중에 돈도 없었다. 자퇴서의 보호자 서명란에 도장을 찍어주던 순옥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시대가 변했데이. 사람 구실 할라믄 전문대라도 나와야 한데이. 자퇴해라마. 그리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데, 핵교 안 댕긴다고 집에서 빈둥거릴 생각 말고 검정고시 치라. 수능도 치고…. 2년제든 4년제든 붙기만 하믄 엄마가 첫 학기 등록금은 내줄끄마.”
주연은 집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봉평 오거리 만화책방에서 아르바이트했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양민정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15평짜리 작은 도서 대여점이었다. 당시 늦둥이를 본 민정의 모친은 갓난아이를 데리고 사량도에 있는 친정에 가 있었고, 민정의 부친은 장녀 민정 말고도 어린이집에 다니는 쌍둥이 아들이 두 명이나 더 있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대여점에서의 일은 편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바닥을 빗자루로 쓸고 대걸레로 닦으면 청소는 끝이었고, 가게가 셔터를 내린 밤 11시부터 이튿날 아침 9시 사이에 회수된 책을 정리해 바코드를 찍고 컴퓨터 모니터에 뜬 반납 완료 버튼만 마우스로 클릭한 후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는 게 알바생 업무의 전부였다.
책방을 찾는 손님은 주로 주변 학교에 다니는 또래 학생들이었다. 봉평 오거리에서 서쪽으로는 진남초등학교가 있고, 동쪽으로는 미륵남자중학교와 미륵남자고등학교가 있었다. 인평중학교를 졸업한 순옥의 아들 병진은 당시 미륵남자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연은 미남고 교복을 입은 손님이 만화방에 입장하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안 그래도 좁아터진 어깨를, 막대기로 쑤시면 일순간에 오그라드는 말미잘처럼 바싹 움츠렸다.
병진은 주연이 학교를 그만두고 만화방에서 알바한다는 점을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만화책을 고를 때 단 한 번도 주연에게 알은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화책을 빌릴 때는 외상이라고 말하며, 실제로는 주연의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차감되도록 유도, 아니, 대놓고 협박했다.
바닥 청소와 책 정리 그리고 손님 받기 이외 남는 한가한 시간은 오롯이 검정고시를 위한 공부에 사용해도 무방하였다. 월급을 덜 받는 대신에 얻은 혜택이랄까. 그 밖에도 점심 저녁 식사가 제공되었으며, 어쩌다 골방에서 주연이 자고 가도 사장님은 그러려니 했다.
봄이 되었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시스템에서 도태된 주연은 책가방을 메고 하교하는 동년배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주연은 퇴근길 해저터널에 들리는 게, 무해하지만 딱히 유익하지도 않은 습관으로 몸에 배어 버렸다.
해저터널은 주연의 통학로였다. 주연뿐만이 아니라 인평중학교에 다니던 섬 아이들이 애용하던 등하교 지름길 같은 거였다. 해저터널의 미수동 입구로 들어가 당동 출구로 나오면 버스 정류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버스를 타고 인평중학교로 가는 게 미수동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는 것보다 시간을 훨씬 절약해 주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꽃잎이 땅바닥을 덮었다. 밤 10시에 출근한 사장님과 하루 매출을 정산한 주연은 밤 11시가 되자 사장님과 함께 유리 현관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렸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재이.”
주연은 털레털레 걸으며 물웅덩이에 떠다니는 벚꽃잎을 지르밟았다. 발길이 닿은 곳은 여느 때처럼 ‘용문달양’이라고 적힌 석재 현판이 걸린 해저터널의 입구였다. 미수동에서 당동까지, 다시 당동에서 미수동까지 해저터널을 왕복해봤자 1km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당시 주연은 돌에 새겨진 용문달양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법을 몰랐다. 열여섯 살이던 주연은 속으로 ‘양달문용’이라고 읊으며 입구 오른편에 설치된 공중화장실로 갔다. 가장 구석진 칸에 들어간 주연은 그곳에서 사복을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곤 화장실에서 나와 온종일 이 순간만을 애태우며 기다린 것 같은 거대한 주둥이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똑, 똑, 똑. 콘크리트가 발린 천장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졌다.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도 음산한 기운이 자옥한 터널이었다.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사람의 기척이 있기 만무하다. 구조물을 지탱하는 아치형 기둥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섰고, 기둥 사이사이에 달린 희미한 황색 조명은 규칙적으로 어둠을 걷어내고 있지만 그 빛은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산한 기운을 증폭시킨달까.
황량한 회색 벽에 부딪힌 주연의 발소리는 낮게 메아리치며 널리 울려 퍼졌다. 분명 혼자였다. 터널 밖에서도 안에서도 혼자라는 기분에 사로잡힌 주연은 이대로 출구가 나오지 않기를 무심결에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빗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바깥으로 나오고 말았다. 제자리에 멈춘 주연은 왼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오른쪽으로 반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한 박자 느리게 따라오던 시선이 정면으로 향하는 순간 사람의 그림자가 주연의 발치까지 길게 뻗어왔다.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한 조명을 등진 자그마한 실루엣을 보아하니 여자아이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인평중학교 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치마가 무릎을 덮는 것으로 보아 올해 입학한 신입생 같았다. 귀밑까지 오는 몽실언니 똑 단발. 으레 컴퓨터용 사인펜이라 불리는 검은색 스타킹과 하얀색 양말. 노는 애는 아닌 거 같은데 어째서 이 늦은 시각에 혼자 해저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
주연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근육에서 힘을 풀며 마주 다가오는 인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타원보다 네모에 가까운 호피 무늬 뿔테 안경을 착용한 여자아이가 스치는 순간 눈을 치떴다. “그만뒀담서 와 교복을 입고 지랄이고?”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소리는 콘크리트 벽을 타고 웅웅 울렸다.
“어, 어?” 주연은 멈칫했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
이미 서너 걸음 멀어진 아이가 자리에 서더니 뒤돌며 또 말했다. “니. 그만뒀담서? 아이가?”
“맞는데….”
주연도 덩달아 뒤돌았다. 자리에 선 두 아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접시가 깨지듯 부딪혔다. 주연은 음영이 짙게 드리운 여자아이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살폈다. 아는 얼굴이 아닌데…. 어디서 본 적 있는 앤가? 머릿속을 뒤져봐도 도통 떠오르는 단서가 없다. 주연은 가늘게 뜬 눈을 더욱더 가느다랗게 뜨며 뿔테 안경 너머의 낯선 눈빛을 읽으려 했다.
“니 내 아나?”
“심주연.”
“어, 맞는데…. 니는 누군데?”
“니캉 같은 반.”
“어?”
“니가 자퇴 안 했으면, 니캉같은 반. 하준희.”
“하준희?”
“내 이름.”
1학년 신입생처럼 보이는 하준희는 3학년 3반이라고 했다. 재킷 팔꿈치도 멀쩡하고, 블라우스 칼라도 빳빳하다. 무엇보다 찰랑거리는 귀밑 3cm가 칼같다.
“관두지 않았으면 내가 3반이라고?”
“어.”
“니가 우예 아는데?”
“출석부 봤다. 자퇴했다고 빨간 줄 짜악 그어져 있데.”
“그래?”
그렇구나. 주연은 아랫입술을 감쳐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딱히 할말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교복은 만다꼬 입고 댕기는데?”
“아, 어?”
당황한 주연의 눈이 삽시에 커졌다.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귓바퀴로 피가 쏠리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
“…그냥.”
“이 야밤에?”
“어, 그냥.”
“….”
“니는 이 야밤에 왜 싸돌아 다니는데?”
“집에 가는 길인데.”
학원? 과외?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대체 어디서 시간을 보내고 이 늦은 시각에 귀가한단 말인가. 주연은 심히 궁금했다.
“니도 어여 집에 가라. 늦었다.”
하준희가 충고하듯 던진 어이없는 발언에 주연은 웃음이 터졌다. “지는…?”
“집이 어데고?”
“미수동.”
“델따 줄까?”
“니 방금 미수동 쪽에서 넘어오는 거 아니가?”
“맞는데.”
“니 가던 길이나 가라.”
웃긴다. 대체 언제 봤다고 데려다준대? 둘은 피식 웃으며 헤어졌다. 주연은 당동에서 미수동 방향으로, 하준희는 미수동에서 당동으로. 과연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했는데 의외의 재회는 만화책방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