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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필피 Sep 13. 2024

주여니(3)

기쁨과 후회

“아 됐다 마. 하여간 이 미친년! 심주여니! 니 오늘 외출 금지다! 알았나!”


병진은 잠 다 깼다며 까치집이 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욕실로 사라졌다. 순옥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나, 이리 얼굴 대 봐라. 엄마가 눈썹 정리해 주고 선크림 발라줄끄마.”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서 물로 씻는 게 다였던 주연의 얼굴에 전문가의 섬세한 손길이 닿았다. 끝이 강어귀 삼각주처럼 널따랗게 퍼진 눈썹은 깨끗하게 깎여 갈매기 날개가 되었고, 선크림만 발라준다던 순옥은 주연의 피부 색깔보다 한층 더 밝은 파운데이션으로 톡톡 두들겨 톤을 정돈해 주었다. 봄에 어울리는 색조로 볼에 색감도 불어 넣었다. 칙칙했던 안면에 어느새 생기가 돋아났다.


“니는 어려서 맨얼굴이 백배 천배 나은데 친구랑 놀러 간다니까 기분 내라꼬 특별히 해주는 기다.”


순옥은 안쪽에 거울이 달린 메이크업 케이스를 닫으며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주연의 작고 보드라운 손에 꼭 쥐여주었다. 보통 땐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새엄마도 주연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그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점을 모르지 않았다. 전학을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학교에 쳐들어가서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주지 못해서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콧구멍에 바람 잘 쐬고 오이라.”

“넹.”하고 대답하는 주연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라고 그 친구도 한번 집에 데꼬오고. 와서 놀다 가래라. 엄마가 돈까스 맛있그로 맹글어줄끄마.”


주연은 호피 무늬 뿔테 안경을 낀 아이가 그랬던 거처럼 코를 찡긋하며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통영 시내 몇 개 없는 중·고등학교 중간시험은 다들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고 또 비슷한 시기에 끝났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출근과 등교하던 시절이라서 한 주의 진정한 쉼표는 일요일 단 하루였다. 예상한 대로 통영의 제일 번화가 항남동 오행당 거리는 몹시도 북적였다. 삼삼오오 우르르 몰려다니는 초·중·고등학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활기가 넘치는 골목은 매일매일 정적 속에 손님을 맞이하던 주연의 심장을 콩닥콩닥 뛰게 했다. 주연은 저도 모르게 뺨을 문지르다가 새엄마가 발라준 볼 터치가 떠올라 재빨리 손을 뗐다. 괜히 볼 색깔이 짝짝이가 되었을까 봐 불안이 스미려는데 누군가가 주연의 어깨를 가볍게 찰싹, 쳤다. 하준희였다.


“어? 주니야.”


준희는 가슴팍에 Guess라고 적힌 흰색 티셔츠와 뒷주머니에 LEVI’S 로고가 박힌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시장에서 보세 옷만 사 입는 주연은 매장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비싼 브랜드 옷이었다. 교복 입은 모습만 봐오다가 사복 걸친 모습을 마주하니 은근히 잘사는 집 아이 같았다.


그리고 무릎을 덮는 펑퍼짐한 치마 교복을 둘렀을 땐 몰랐는데 바지에 허리띠까지 알차게 찬 모양을 보니 진짜 비율이 좋긴 좋았다. 팔다리가 길쭉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몸통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사진발을 정말로 잘 받겠다 싶었다. 서울에 놀러 가 길거리 캐스팅을 받았다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이야, 연이. 니, 오늘 좀 쪼쟁였네? 니 화장했나?”

“티 나나?”

“목이랑 얼굴이랑 색이 다른데 티가 안 나겠나?”

“아.”


준희는 주연의 손목을 잡고 복잡하게 얽힌 골목 어딘가로 데려갔다. 시내의 큰길 말고 비좁은 미로를 헤맨 적이 없어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주연에게도 낯선 담벼락이었다. 준희가 데려간 곳은 후미진 곳에 달랑 세워진 인적이 드문 공중화장실이었다. 이런 데가 있었구나.


“이리 티가 나게 화장하믄 우야노. 달걀귀신처럼 대가리만 둥둥 떠다니는 거 같다 아이가.”

“그런나?”


준희는 어깨 줄을 최대한 줄인 파란색 잔스포츠 가방을 가슴 앞쪽으로 돌려 메고는 “이모들이나 이렇게 화장하지….” 하고 핀잔주며 배낭 앞주머니 지퍼를 열었다. 준희가 꺼낸 것은 새엄마가 방문 판매하는 비싼 국산 브랜드보다 더 비싼 대칭적인 ‘C’가 서로 맞물린 로고로 유명한 샤넬 제품이었다. 만화책방 카운터에 진열된, 전화번호부보다 두껍고 무거운 월간 여성 잡지에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하는 브랜드. 주연은 짝퉁일 수도 있겠다 미심쩍어하면서도 입을 쩍 벌렸다.


“이거 샤넬인가 뭔가 하는 그거제? 엄청 비싸다쿠든데.”

“엄마 꺼.”

“오늘 또 집에 몬 들어가는 거 아니가?”

“니가 늦게까지 놀아줄 거잖아.”

“뭐, 보고….”


옷도 그렇고 화장품도 그렇고, “느그 집 부자가?”


노골적인 질문에 준희는 풉, 하고 터졌다. 대답 대신 투명한 봉지에서 솜을 꺼냈다. 솜에다가 스킨을 몇 방울 떨어뜨려 충분하게 적셨다. 그러곤 구부린 검지로 주연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턱과 목의 경계선을 부드럽게 허물었다. 짝짝이가 된 볼 터치도 수정했다. 이목구비가 똘망똘망한 준희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며 피부를 만지작거리는 게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주연의 얼굴엔 주근깨가 있었다. 콧등과 볼 위에 촘촘히 자리 잡은 작고 희미한 점들이 있어서 타인의 시선이 그곳에 머무르는 걸 느낄 때면 고개를 돌리곤 했다. 화장실 거울을 등진 준희가 주연의 얼굴을 다루는 동안 주연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힐끔거렸다. 준희의 콧바람이 주연의 얼굴 앞에서 넓게 퍼졌다. 시간이 꽤 흘렀다. 행여 주근깨를 새어보는 건 아닐까. 괜한 불안에 사로잡히려는 찰나였다.


“다 했다.”


준희는 썩 마음에 든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화장품을 도로 다 집어넣은 뒤, 이번에는 가방에서 검은색 머리 망사를 꺼냈다. 두 개였다.


“머꼬?” 주연이 물었다.

“죄다 청불이드라.”

“어?”

“영화관 말이다. …신장개업, 그거 재밌다든데.”

“아이다! 그거 무서운 영화다.”

“머라카노? 코메디다.”

“청불이라매?”

“토막 난 시체가 나와서 청불이지….”

“어?”

“…여고괴담이랑 비교하면 무서운 게 아니라 배꼽 빠진다고 하드라.”

“니는 우찌 아는데?”

“네티즌들이 남긴 감상평 봤지.”

“청불이면 우리는 못 보잖아?”

“그라니까 내가 다 챙기왔다 아이가.”


준희는 넓게 펼친 망사를 자기 머리와 주연의 머리에 각각 씌었다. 그러곤 끈을 조여서 묶는 천 가방도 꺼냈는데 그 안에는 긴 머리카락 가발이 또 두 개나 들어 있었다.


“우와….” 주연은 입이 떡 벌어졌다. “어데서 났노?” 긴 머리라 그런지 아무리 봐도 귀신같다.


“엄마 꺼.”

“엄마가 가발 쓰시나?”

“그건 아닌데. 쓸데없이 가발이 좀 많다, 우리 집에.”


만 서른 살과 서른네 살의 차이는 미미하지만, 만 열넷과 열여덟의 격차는 자명하다. 하지만 여기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죄다 귀밑 3cm 단발이었다. 하여, 긴 머리카락은 화장과 옷만으로 속일 수 없는 크나큰 갭을 채워줄 터였다.


둘은 손을 마주잡고 포트극장으로 달려갔다. 주연은 들키면 어른한테 야단을 들을까 봐 심장이 쿵쿵거리고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났다.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 드는데도 이상하게 즐겁다.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무섭나?”

“들키면 우짜노?”


침이 바싹바싹 마르고 목구멍으로 불안감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우짜긴 걍 못 보는 거지.”


준희는 그것 말고 다른 결과는 초래되지 않을 거라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힘차게 층을 올랐다. 주연은 준희의 손에 이끌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초조감에 왼쪽 손의 검지 두 번째 마디를 앞니로 질근 깨물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니는 저기 서서 가마이 있어라.”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운 준희는 매표소로 성큼 다가가 당당하게 줄을 섰다. 꼬리에 꼬리를 문 줄은 타들어 가는 심지처럼 금세 짧아졌다. “신장개업….” 준희는 고개를 젖히고 상영 시간표를 쓱 훑더니 “2시 30분 꺼, 두 장 주소.”라고 툭 던지듯 주문했다. 쥐구멍이 나 있는 아크릴판 안쪽에서 “9천 원.”이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매표소 아저씨는 준희의 나이도, 멀리 서서 손가락을 깨물고 있는 주연의 나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주연은 땀을 식히기 위해 양손을 펴 흔들다가 “아, 맞다. 돈!” 하며 지갑을 꺼내려는데 이미 표를 구해온 준희가 “떡볶이는 니가 사라.”하며 다시 주연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층을 와다다다 뛰어 내려갔다. 사정없이 흩날리는 인조모가 인중을 간지럽힌다.


알고는 있었지만 하필이면 딱 점심시간이었다. 즉석 떡볶이 분식점마다 만석이었다. 하는 수 없는 두 아이는 조금 걷기로 했다.


“즉석 떡볶이 말고 그냥 떡볶이 묵자.” 주연이 준희를 바라보며 곯은 배를 문질렀다.

“데파트 뒤에 중앙시장 갈래, 그라몬?”

“거 맛있는 집 있나?”

“서서 먹어도 되는 데라서 사람 아무리 많아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라믄 글루 갈까?”


둘은 손을 꽉 잡고 또 와다다다 달렸다.


땀이 나게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떡볶이도 맛있고 오뎅 국물도 얼큰했다. 떡볶이 소스에 찍어 먹는 오징어튀김은 3개나 연속해서 씹어 삼켰다. 두 아이는 서로 경쟁하듯 먹어 치웠다. 너무 즐거웠다. 3학년 3반에 준희가 있단 걸 미리 알았더라면 자퇴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몇 주 더 견디지 못했던 어리석은 결정의 사무치는 후회가 밀려든다.


“이게 누꼬?”


느닷없이 파고드는 익숙한 음색에 주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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