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방
느닷없이 파고드는 익숙한 음색에 주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뒤돌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지 않고 잠시간 몸이 굳은 채 가만히 얼음이 되어 버렸다. 잘못 들은 거겠지. 나한테 하는 소리가 아닐 거야. 기우에 그치길 간절하게 바랐으나 박복한 주연의 인생이 순탄할 리 없다.
“이거, 고아년 아이가?”
주연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눈길이 움직이는 동선을 쫓아 목도 어깨도 뒤를 이었다. 멀대같이 길쭉한 김하나의 멸시 어린 시선이 주연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주연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떨구고 손님들이 흘린 음식물로 인해 지저분해진 시장 바닥을 쳐다보았다.
“어라? 니 뽄지깄네? 파데 발랐나? 이야, 자퇴했다드만 니 핵교 관두고 나가요 나가나?”
초등학교 졸업 선물로 쌍꺼풀 수술을 받은 조미주가 깊숙하게 숙인 주연의 턱을 억지로 치켜올리며 비꼬았다.
“머꼬? 머꼬? 니 친구도 있나?”
눈꼬리가 처져 자기네들끼리 부르는 별명이 류시원인 송지영도 있었다. 이 세 명은 베드로 아저씨의 외동딸이자 주연과 집에서 한방을 쓰는 최은영의 베프들이었다. 그러니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당연히….
“오빠가 니 찾아서 퍼뜩 데꼬 오라카드라. 화장하고 기어 나갔다고 다리 몽둥이 뿐지른단다.”
김하나 뒤에 서 있던 최은영이 고개를 빼쭉 내밀며 등장했다.
“음마? 니 이거 가발이가?”
별꼴을 다 본다며 최은영은 오만상을 구기며 주연이 쓰고 있던 긴 머리카락 가발을 와락 잡아당겼다. 고정해 놓은 실핀이 떨어지고 가발이 옆으로 주륵 벗겨지려는 순간, 하준희가 무심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먼데? 와 이라는데?” 아무리 그래도 4대 2인데, 준희는 전혀 겁먹은 음색이 아니었다.
“니는 먼데? 고아년 베프가? 니도 자퇴생인갑제?”
최은영이 하준희의 머리칼을 만지려 손을 뻗었고, 주연은 준희 쪽으로 뻗쳐오는 마수를 온몸으로 저지했다.
“하지 마라.”
어디서 튀어나온 용기인지 모르겠다. 자기가 쥐어박힐 때는 절대 나오지 않던 구석에 처박힌 속내가 친구가 당하려 하자 멋대로 비어져 나왔다. 단 네 음절에 주연 스스로도 놀라고 최은영의 패거리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염소같이 떨리는 목소리가 줄 수 있는 타격감은 제로였다. 2학년 내내 당한 게 너무 많은 까닭에 진심으로 우러나온 용기임에도 불구하고 뿌리가 깊은 두려움은 감추기가 어려웠다.
“하지 마라?”
“방금 쟈가 울 더러 하지 말라고 했나?”
“도랐네. 병진이 오빠야가 저년 도랐다드만 진짠 갑네.”
“인자 봄인데 저년만 벌써 더위 처먹었는갑다.”
“북어랑 고아년은 사흘에 한 번씩 패줘야 하는데 우리가 좀 게을렀네.”
아이는 어른보다 잔인하다. 도덕 시간에 배웠던 성선설과 성악설이 떠올랐다. 인간 본성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인데 주연은 경험상 성악설이 맞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타인에게 가하는 악행에 즐거움을 느낀다. 사회 규범이나 법을 휘둘러 통제하지 않으면 본성대로 행동하는데, 규범과 법이 통하는 어른과 달리 아이는 무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미성숙한 4인방은 통제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무적이다.
“시발년들이 니들이야 말로 처도랐네.”
떡볶이 소스가 묻은 준희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 잊고 있었다. 주연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준희도 아직 어른은 아니었다. 저들과 같은 미성년자가 아니었던가.
“연아 일단 계산해라.”
“어, 어.”
주연은 준희가 시키는 대로 했다.
“아줌마 저희 얼만데요?”
“몇 개 문노?”
“떡볶이 2인분, 오뎅….” 어디 보자 “네 개. 또 오징어튀김은 다섯 개, 고구마는….”
준희가 낸 영화 값에 비하면 얼마 나오지도 않았다. 주연은 급하게 새엄마가 준 빳빳한 배춧잎을 꺼내 주인아주머니에게 건넸고, 아주머니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와 동정을 헤아려 주연에게 거슬러 주었다.
점심값을 계산하는 모습을 지켜본 준희는 주연이 잔돈을 지갑에 넣는 것을 확인하곤 종이컵에 뜨끈뜨끈한 오뎅 국물을 주걱으로 차분히 퍼 담았다. 입으로 후후, 불어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열기를 대기로 흘려보내며 동시에 까만 눈동자를 굴려 네 명의 패거리를 하나하나 집중해서 스캔했다. 그러곤 식지도 않은 오뎅 국물을 4인방에게 뿌렸다.
“꼴값 떨지 마라, 확 직이삘라.”
준희의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에 가장 놀란 건 시장통 분식집 아주머니였고, 그다음은 주연.
“야야, 뭐 하는 짓이고?”
“주, 준희야?”
그리고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최은영의 패거리와 주변에서 떡볶이를 집어 먹던 다른 손님들이었다.
“엄마야, 머꼬?”
“무슨 일이고?”
“아, 뜨, 뜨… 뜨, 뜨!”
“꺄아, 악, 이 시발년이!”
“엄마야!”
“꺄아아악! 머꼬!”
엄청난 일이 순식간에 터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연은 준희의 팔목을 잡고 마구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마른 몸치고는 뼈마디가 굵다는 뜬금없는 감상이 머리를 스쳤다. 헉헉, 헉. 주연은 의도적으로 보행자가 북적이고 복잡한 곳으로 계속해 틈을 헤집고 들어갔다.
“허, 헉. 와? 와, 도망가는데?”
준희는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원치 않게 속도가 느려졌다. 주연은 사방을 빠르게 둘러보았고 식당과 옷집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준희를 끌고가 몸을 숨겼다.
“하하, 하아. 니, 우얄라고 오, 오뎅 국물을 뿌릿노?”
“주먹 쓰면 아프다 아이가.”
“주, 주먹?” 주연이 인상을 쓰고 “쟈들이잖아, 학교에서 니 괴롭힌 애들….” 준희도 오만상을 찌푸렸다.
“쟈 최은영이제? 니캉 한집에서 같이 사는 아. 맞제?”
하준희는 최은영이 누구인지 또 주연과 어떤 관계로 엮였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주연은 준희를 빤히 노려봤다.
“화상 입으면 우짤라고 그랬노?”
“펄펄 끓는 물도 아닌데?”
호로록 마셔도 입천장이 델 정도로 뜨겁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라꼬?”
준희가 주연의 옷소매를 와락 걷어 올렸다. 팔오금에 길쭉한 일자로 화상 자국이 드러났다. 까만 눈동자가 상처를 찍고 올라왔다. 이번엔 준희가 주연을 쏘아보며 묻는다.
“이 화상을 입고 니는 우쨌는데?”
“…!”
주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마가 끝난 찜통 여름이었다. 2학년이었고 1학기가 끝나가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2학년 7반 37번이던 주연은 1분단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이미 기말시험도 끝난 터라 수업은 따로 없고 1교시부터 7교시까지 단체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가 보기 싫으면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주연의 바로 뒷자리에 김하나가 있었다. 반에서 키가 제일 큰 아이였다. 조미주와 송지영은 1분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하나의 짝꿍이 장기 결석 중이었고, 그랬기에 옆자리는 늘 비어있었고, 1분단 끝자리는 모여 앉아 놀기에 적소였기에 주연의 뒷자리는 항상 시끌벅적했다.
3~4월만 해도 주연은 3인조의 타깃이 아니었다. 학기 초에는 김하나와 키가 얼추 비슷하게 컸던 이혜영이라는 아이가 괴롭힘을 당했는데 이유에는 색깔이 없었다. 그저 할머니와 동생과 셋이 산다는 점이 그 아이를 약자로 만들었을 뿐이다. 임채진이라는 한문 교사가 한 번은 이혜영을 비 오는 날 먼지 나듯이 두들겨 팬 적이 있었는데 학교로 찾아오는 보호자가 없었다. 임채진이 바위 같은 주먹으로 인중을 때리는 바람에 이혜영의 앞니가 깨졌는데도 말이다.
얘는 괴롭혀도 된다. 때려도 된다. 할퀴고 피가 나도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이 아이를 위해 나서는 어른은 없다. 그러니 마음껏 놀리고 따돌리고 밟아도 된다. 3인조는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다. 냄새난다, 씻어라, 더럽다, 교복은 대체 언제 빨아 입노. 생리대가 없어서 두루마리 휴지 말아서 쓰제. 씨발년아, 니는 사람이 말을 하는데 와 다 씹고 지랄이고? 당하다 당하다 결국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을 때 이혜영은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3인조가 뱉은 말은 어디서 맛있는 오징어 굽는 냄새가 난다, 였다.
그 무렵 김순옥과 베드로가 합가하고 최은영과 주연이 작은 방을 나누어 쓰기 시작했다. 주연은 7반이었고 최은영은 1반이었다. 층이 달랐다. 최은영의 학급은 2층 중앙계단과 가까운 교무실 옆이었고, 주연이 속한 반은 3층 서쪽 계단 끝 남자 화장실 옆이었다. 최은영은 7반의 3인조와 1학년 때부터 절친이었고 쉬는 시간마다 7반으로 건너와 4인조 완전체를 만들었다.
사물함에 기대어 선 최은영은 가슴 앞으로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선 죽을상을 지었다. 저 거지 같은 고아년이랑 같이 살게 되었다고 쟤는 엄마도 도망가고 아빠도 죽고 일가친척도 없다며 주연이 얼마나 외롭고 나약한 먹잇감인지 낱낱이 떠벌렸다. 쟤는 괴롭혀도 돼. 괴롭혀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
“니 새엄마랑은 친하댔잖아.” 준희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