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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필피 Sep 16. 2024

주여니(5)

패션 안경

“니 새엄마랑은 친하댔잖아.” 준희가 물었다.

“….”

“은영이 저년이 괴롭히는 거 새엄마는 모르시나?” 준희가 또 물었다.

“….”

“어?”

“모르시는 거 같기도 하고 아시는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학교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 중 하나가 베드로 아저씨의 딸 최은영이라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고자질하면 새엄마가 의붓딸을 어르거나 달래거나 혹은 야단 비슷한 걸 칠 것이고 그러면 베드로 아저씨가 병진 오빠를 가만둘 리 없었다. 새엄마가 속상해하지 않을까. 새엄마의 눈엔 병진 오빠의 괴롭힘도 장난에 불과하다. 덩치가 큰 오빠의 주먹도 장난으로 보는데 주연보다 체구가 작은 최은영의 행동을 어른이 개입해야 할 사건으로 보기나 할까.


“집에서도 괴롭히나?”

“어? 어. 아니.”


다행히도 집에서는 부딪히지 않았다.


“아무한테도 도와달라고 안 해봤나?”


자기도 이혜영을 도와주지 못했는데 염치도 없이 누구한테 도와달라 요청하란 말인가. 주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일했다. 묵묵하게 기다리면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 했다. 3학년으로 올라가면 반이 바뀔 것이고 그러면 4인조와 자연스럽게 떨어지지 않을까. 하지만 2학년 2학기가 되고 반 전체가 주연을 갈구자 실낱같던 그 작은 희망마저 4인조가 피던 담배 연기와 함께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자퇴해도 되냐고 새엄마에게 물었다. 순옥은 별말 없이 즉시 그러라고 했다. 그러니 아마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왕따를 당하는걸. 따돌림을 당하는걸. 괴롭힘을 당하는걸. 순옥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라고 했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지만 주연이 원한다면 2년제든 4년제든 1학기 등록금은 기꺼이 내어주겠다고 했다. 가급적이면 통영이나 거제가 아닌 조금 먼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집을 떠나 홀로 자립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조언했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주연이 당하고 있는 게 장난이 아니란 걸. 그러니 새엄마가 품고 있는 가족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걸.


“니 바보제?”


응. 주연은 속으로 대답했다.


“문디.” 준희는 오만상을 구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독립하는 그날만 바라며 끄적끄적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주연은 알지 못했다.


분식집 앞에서 그 일이 있고, 주연은 준희를 걱정했다. 오뎅 국물을 뒤집어쓴 4인방은 준희를 모르는 눈치였다. 준희는 눈에 띄는 외모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학년에 8반밖에 없는 학교에서 찾으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4인방이 준희의 호피 무늬 안경테를 기억하고 있다가 월요일 학교로 돌아가서 샅샅이 뒤지면 어쩌지? 준희를 괴롭히면 어쩌지? 내 소중한 친구가 나처럼 당하면 정말 어떻게 하지? 불안에 휩싸인 심장이 아프리만치 쿵쾅거린다. 괜히 나 때문에…. 일찍 학교를 그만두었던 이혜영이 떠올랐다. 라이터 불에 타버린 그 아이의 머리카락이 뇌리를 스친다.


주연은 신장개업을 관람하는 대신 안경원에 들러 안경테를 바꾸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점심을 사고 남은 잔돈과 배춧잎이 한 장 더 있었다. 당시 저렴한 학생용 안경테는 5천 원 정도였고 안경알은 압축이 필요 없다는 전제하에 1만 원 남짓. 패션에 관심이 다분했던 병진 오빠는 안경알이 없는 5천 원짜리 싸구려 뿔테를 알록달록 색깔별로 갖고 있었다.


“만다꼬. 됐다.”

“걔들 무섭다. 내 말 듣고 안경테 바꾸자. 내가 사줄게.”


주연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안경원을 가리키며 준희의 반소매를 잡아끌었다.


“됐다고.”

“내 말 좀 들어라.”


실랑이가 이어졌다. 주연은 고집을 부렸고 준희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합의점을 모색한 건 준희였다.


“학교에 안경 벗고 갈게. 됐제?”


주연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어?” 무슨 말이야. 안경을 벗는다니? 안 써도 돼? 당시에는 콘택트렌즈가 고가였다. 게다가 이물감이 느껴지는 착용감 때문에 주연의 중학교 1학년 담임도 새 학기가 시작하고 눈에 넣어 끼는 작은 렌즈를 몇 주 사용하다가 다시 안경으로 돌아왔었다. 주연이 렌즈를 끼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준희가 안경을 벗어 주연에게 한번 써보라며 건넸다.


어라? 굴절이 없다? 유리알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하나도 어지럽지 않았다.


“도수 없나?”

“어.”

“그라몬 와 쓰고 댕기는데?”

“쪼쟁인다고.”

“뭐라꼬?”


헛웃음이 터졌다. 주연은 자기 콧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땀 안 차나?” 불편하지 않느냐고.


“전혀.”


잠깐의 정적이 지나가고 주연이 씩 웃었다. “그래, 그라몬 그거 이제 쓰고 댕기지 마라.” 적어도 당분간은. 4인방이 호피 무늬 안경테를 잊어버릴 때까지만이라도.


“알았다.”


안경을 벗겠다고 약속한 준희는 그 후로 한 2주일 정도 봉평 오거리 만화책방에 들르지 않았다.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먼저 안 해볼 수가 없었다. 주연은 준희에게 서너 번 삐삐를 쳤다.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시험도 끝났는데 안 놀러 오나? 니가 보던 만화책 다음 권 나왔다. 온나. 내 심심하다. 우물 정(井)자를 누르고 연락받을 전화번호도 남겼다. 42-로 시작하는 여섯 자리 만화책방 카운터 전화번호였다. 회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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