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희
과연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했는데 의외의 재회는 만화책방에서였다.
연분홍색 꽃잎이 떨어진 나뭇가지에 새 움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색 새싹이 돋았다. 봉평 오거리 버스 정류소를 향해 유리 벽이 트인 만화책방 카운터에 앉아 하교하는 손님 무리를 받고 있던 주연의 시야로 하준희의 모습이 비집고 들어왔다. 곧이어 유리 현관문이 열리고, 남자 손님들 사이로 인평중학교 치마 교복을 입은 며칠 전 해저터널에서 본 그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어? 여 느그 집이가?”
“아니. 친구네.”
“봐주고 있나?”
“어? 알반데?”
“알바?”
“알바해도 되나?”
안 될 건 뭐란 말인가? 새엄마가 보호자 동의서도 적어줬는데.
“어? 어. 되제.”
하준희는 미남중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들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며 만화책을 찬찬히 구경했다. 보통 여자아이라면 쑥스럽고 어색해서 저렇게까지 책장 가까이서 책을 고르지는 않을 텐데.
“여서 보고 가도 되제?”
“어, 어?”
15평 남짓한 책방에는 테이블 하나 없었다. 이중 삼중으로 된 책장만 빼곡했다.
“집에 가져가면 엄마한테 머리채 잡히거든.”
“아, 아.”
주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하준희에게 뒤편 골방을 안내해 주었다.
“여서 읽어라.”
“얼?”
이런 데가 있었네, 하는 눈빛이었다. 하준희는 만화책 몇 권을 집어 권당 300원을 내고선 문을 닫고 꽤 오랜 시간 잠적했다. 주연은 끊이지 않고 밀려드는 손님을 받았다. 회수한 책을 제자리에 꽂고, 바코드를 찍고, 지폐를 받고 동전을 거슬러 주었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이 지나자 골방 문이 살포시 열렸다.
“니 뭐하는데?” 하준희가 묻고, “고, 공부….” 주연이 답했다.
“몇 시 마치노?”
“사장님 오시면 같이 시마이하고 샤따 내린다.”
“그게 몇 신데?”
“한…. 대강 11시? 와?”
“오늘도 교복 입고 해저터널 갔다가 집에 갈끼가?”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질문에 주연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연붉게 달아올랐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인평중에 다니는 동갑한테. 참…. 본 걸 안 본 거로 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입 안 속살을 질끈 깨물며 어색한 침묵을 이어가던 주연은 결국 말문을 열었다.
“아니. 그때는 그게…. 피치 못할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란 거고…. 원래 막 교복 입고 안 그란다. 자퇴했는데… 머, 내가 인평중 학생도 아니고….”
어영부영 내어놓는 변명은 자신이 듣기에도 설득력이 영 부족했다. 그러나 하준희는 별 관심 없는 듯 딱 벌어진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궁금해서 질문을 던지긴 했어도 당사자의 입에서 반드시 진실한 고백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주연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든 준희는 스스로 내린 자기만의 결론이 있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 읽은 만화책을 반납한 하준희는 아까보다는 한가해진 책방을 어슬렁거리며 둘러보았다. 발판을 가져와 위에서 두 번째 칸에 있는 책 열 권을 한꺼번에 꺼냈다.
“니, 집에 안 가나?”
벌써 8시잖아.
“엄마랑 싸웠거덩. 주무시면 몰래 들갈라꼬.”
준희는 카운터에 책을 내려놓으며 싱겁게 웃었다.
“얼마고?”
“3천 원. 아, 근데 여기서 보고 곧바로 반납하니까…. 천 원만 받을게.”
“사장님이 그래도 된다카드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원래 300원 주고 빌리면 신간 말고는 2박3일이거든.”
“고마 그냥 다 받아라. 집에서 읽으나 여서 읽으나 차피 읽는 건 매한가지 아이가.”
두 번째 만남이 있은 후, 주연과 준희는 대번에 친해졌다. 주연은 준희에게 “접때도 느그 엄마랑 싸워서 늦게 들간기가? 거의 밤 12시였잖아.” “학교는 어떤 노? 담임은 어떤데?” “원래 만화책 좋아하나? 회원 가입해라. 가입하면 열 권 한꺼번에 빌릴 때 한 권 공짜로 빌리준다.” “니는 어디 사는데?” “학원 같은 건 안 다니나?”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낀데?” 등을 조잘조잘 물었다.
그리고 준희는 주연에게 “아까 하던 공부는 먼데?” “검정고시? 그라몬 나중에 고등학교는 갈끼가?” “아아, 중졸도 고졸도 전부 검정고시로?” “공부 못하는 건 아니라드만. 니캉 같은 반 했던 애들이 그라드라. 반에서 10등 안에는 들었다매?” “학교 와 그만뒀노?” “니 2학년 때 왕따였다든데 맞나? 그래서 그만둔기가? 애들이 따돌려사서?” 등을 예사롭게 질문했다.
도망간 친엄마를 닮아 꽤 키가 컸던 주연에 비하면 하준희는 다소 작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조막만 한 얼굴과 길쭉한 팔과 다리 덕분에 딱 보면 첫인상에 그리 작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달까. 어떻게 보면 비율이 좋아서 잡지 모델을 해도 좋을 것 같은 이미지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오묘한 분위기가 흔한 또래 아이 같지 않달까.
주연은 준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왕따였냐고 묻는 어감은 조롱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투였다. 왕따를 당했어? 그래서 그만둔 거야? 주연을 보며 불쌍해하지 않았으며 어떤 식으로든 평가한다거나 내려다본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똑 부러지는 하준희는 엄마와 다투는 일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집에 늦게 들어가야 한다며 봉평 오거리 만화책방을 찾았다. 책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을 홀로 지키는 주연으로서는 준희의 방문이 매일 같이 기다려졌다. 알고 보니 준희는 공부를 진짜 잘하는 아이였다. 무엇을 물어봐도 답이 척척 나왔다. 매번 정답을 딱 맞추는 게 혼자 몰래 도라에몽 식빵을 먹는다 해도 믿을 판이었다.
“학원 안 다닌댔제? 그라몬 과외하나?”
“아니. 과외는 무신….”
“원래 똑똑한기가?”
“음. 그른갑지.”
“니 지금 잘난체하나?”
“체가 아니라 내 진짜 잘났는데?”
준희는 코를 찡긋하며 얄밉게 웃었다. 주연은 “만화책이나 계속 봐라.”하며 골방문을 콩, 닫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중학교 중간시험 기간이 끝났다. 봉숫골 하늘을 완연하게 덮고 있던 연한 봄꽃도 다음 해를 기약하며 작별한 지 오래였다. 준희의 시험이 끝나면 둘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로 한 일요일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선선한 바람이 살랑였다. 주중이고 주말이고 집과 만화책방, 봉평 오거리와 운하맨션만 오고 가던 주연에겐 그야말로 간만의 외출이 아닐 수 없었다.
오전 11시에 만나 하루 종일 함께 놀기로 했다. 즉석 떡볶이도 먹고, CNA 대형 문구점도 가고, 스티커사진도 찍고, 오락실에 가서 DDR 한판을 때리기로 한 주연은 출근 준비에 한창인 새엄마에게 뽀득뽀득 씻은 말간 얼굴을 부담스럽게 내밀었다.
“엄마, 나 화장.”
김순옥은 턱을 당기며 ‘으잉?’하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턱이 여러 층으로 겹쳐지면서 투턱, 쓰리턱이 만들어졌다. 잘못 들었나? 하는 속내가 표정으로 드러났다. 주연의 요청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곱씹는 순옥의 고개가 이내 비스듬하게 갸울어졌다.
“아니 막 화려하게 색칠해 달란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이쁘게.”
머쓱해진 주연은 활짝 편 양손을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자, 자연스럽게? 이쁘게에? 우얀 일이고? 와? 여나, 니 남자친구 생깄나?”
진심으로 놀란 순옥의 음정은 끝에 가서 결국 이탈하고 말았다.
거실에서 널브러져 자고 있던 이병진이 중국 영화에 등장하는 강시처럼 벌떡 일어섰다. 눈꺼풀이 반이나 감겼는데도 스타워즈 레이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험상궂은 면상을 디밀며 꽉 쥔 주먹으로 주연의 이마를 퍽, 때렸다.
“이 미친년아. 니 이랄라고 자퇴했나? 검정고시 준비한다드만 자빠져 놀고 지랄이고? 한가하게 연애할 시간이 있든가배?
“아니! 아, 아니다! 그냥 친구 만나는 기다. 남자 아니고 여자다.”
병진은 따발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라몬 화장은 와 하는데? 니 미친나? 도랐나? 니 나이가 몇이나 처먹었다고 벌써부터 발랑까지게 화장? 이게 말이가, 방구가 시발. 시발년아 니 그라고 시내 싸돌아 댕기면 울 엄마가 욕듣고 내가 욕듣는다, 아나?” 사납게 올라간 눈꼬리가 이마에서 합체할 지경이었다.
“아이고, 고마해라! 그래. 오빠야 말대로 화장은 안 돼.” 난동 부리는 축구 선수를 향해 호루라기를 부는 심판처럼 순옥이 병진을 막아섰다. “그라고 진아 욕 하지 말랬제, 엄마가.”
“이년이 속을 썩이잖아.”
“동생한테 이년이 뭐고!”
“동생은 무슨 동생? 걍 불쌍해서 끼고 사는 고아년이지.”
“떽! 주디 안 닥치나!”
“아 됐다 마. 하여간 이 미친년! 심주여니! 니 오늘 외출 금지다! 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