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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Dec 23. 2017

“진짜 여행은 길 잃는 연습부터”

내가 만난 바리스타_ 라떼아티스트 엄폴

2016년 3월.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봄날이었다. 상하이로 향하는 동방항공(東方航空) 이코노미석에서 읽는 블레즈 상드라르(Blaise Cendrars)는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스위스 출신의 시인은 1887년에 태어나 15세에 뮌헨에서 떠돌이 보석상인 르고빈을 만나 5년간 그를 따라 페르시아, 인도, 아르메니아, 시베리아, 중국 등을 떠돌았다. 파리에서 잠시 양봉을 하다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브뤼셀, 영국, 러시아, 케나다를 거쳐 미국에 다다라서는 글을 쓰고 장 콕토와 사리렌 출판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영화감독 아벨 강스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브라질, 에콰도르, 파라과이, 아르헨티나를 정기적으로 다니며 소설을 쓰고 2차 세계대전에 종국기자로 참전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뉴욕까지

지금까지, 나는 살아오는 동안 내내 기차들과 경주했다

마드리드에서 스톡홀름까지 

그리고는 내깃돈을 모두 잃어

이제 남은 것이라곤 파타고니아, 내 거대한

슬픔에 어울릴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와 남부 대양을 향한 여정뿐

나는 길에 있다

나는 언제나 길에 있었다

- <프랑스의 소녀 잔느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산문> 중   


시인과 달리 길 위의 삶이 편안하지 않았던 나는 떠밀리듯 찾아가는 대륙의 땅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안개 속을 걸어가듯 헤매던 곳에서 그를 만났다.      



‘월드커피이벤트’(World Coffee Events, WCE)’가 매년 개최하는 ‘월드커피챔피언십(World Coffee Championships)’은 세계 각국에서 국내대회를 거쳐 1위로 선발된 바리스타들이 출전해 6개 부문에서 실력을 겨룬다. 2015년까지 WCE 주관 대회에서 한 번이라도 우승 트로피를 가져간 국가는 모두 19개국에 불과했다. 이중 최다 우승국은 호주로 총 8회를 기록했다. 호주에 이어 일본, 그리스, 덴마크, 노르웨이가 4회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대만, 영국이 각각 3회씩을 기록했고 한국은 그해 월드라떼아트챔피언을 배출해 우승국가에 포함됐다. 그는 상하이 대회 라떼아트챔피언십에서 챔피언 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리며 감격해하던 바리스타 엄폴이다.     



어리둥절해 하던 모습 속의 그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초면이었지만 그에게선 자유의 냄새가 났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챔피언이 되고 서울에서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재미있었고 건반 위를 옮겨다니는 손가락처럼 경쾌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할 때도 올해는 그냥 쉬려고 했어요. 제 나름대론 장기백수프로젝트라고 사람들한테 이야기하고 다녔죠. 무작정 쉬는 것은 아니고 제대로 쉬는 법을 한번 배워봐야겠다 뭐 이런 마음으로 시작한 거죠. 만나는 사람들이 일 안해요? 하고 물어보면 장기백수프로젝트중이라고 대답했죠.    


인터넷 생방송을 준비하던 그는 기타를 들고 블루스 한 곡을 불렀다. 선유도의 태양은 적당히  넘어가려 애쓰고 있었고 지붕으로 반사된 빛들이 기타줄을 튕기듯 스쳐지나갔다.    

 

군 제대후 복학할 즈음. 하기 싫은 자동차학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고 했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초코소스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꽃을 만드는 것을 보게 됐다. 원래 요리사가 되고 싶었지만 집에서는 못하게 하고 그저 그림 그리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거구나. 일타쌍피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몰래 시작했고 몰래 대학의 학과도 바꿔버렸다. 모두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한숨도 많았지만 운명이었다.   

 

라떼 아트는 커피에서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화려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액세서리죠. 자체로는 의미가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더해졌을 때 바탕을 더 살려주는 것? 음식에서 액세서리는 향신료가 하는 역할이지 않을까요. 어떤 향이 나느냐에 따라 그 음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잖아요. 맛있는 음식은 기본이고 맛있는 커피는 당연한 것인데 기본적으로 옷을 걸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여기에 선글라스를 하나 걸치게 되면 패션을 완성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드립의 경우에는 예쁜 잔을 내놓죠. 그것이 액세서리죠. 로스팅을 하는 사람들은 포장을 예쁘게 하고 캘리그래피나 이런 것을 이용해 포장을 하죠. 그런 것처럼.   



그는 커피 때문에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하다는 것이 마냥 잘 되서 느끼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 좋은 것 안 좋은 것을 다 겪으며, 내가 남들보다 더 견딜 수 있을 만큼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행복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사람들을 위한 커피를 하다가(가게를 하는 동안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고, 그러고 나니까 이제는 자신을 위한 커피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재미있게 즐겁고 배우면서 호기심이 생기고 깨달음이 생기는 책. 전 세계를 다니며 강연과 교육을 하고 싶다는 희망도 덧붙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라떼 아트라는 한 분야 말고 커피를 통해서 사람을 이해하는 커피 상담, 커피 치료와 같은 것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그와의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 그 속에서 좌절하는 수많은 청년들의 꿈이 그대로 묻히지 말고 소생되기를, 엄폴이라는 바리스타를 통해 그 희망의 끈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그와의 작업을 시작한 계기였다.    


미술 치료가 있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커피치료나 상담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커피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창의적인 것을 깨닫게 해주는 물리 화학적인 부분들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창의적인 것을 이끌어내는 교육법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상하이 세계대회가 끝난 후 <니케이 아시아 저널>은 ‘팅커벨이 양과 나비를 잠재웠다’는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지금은 그를 상징하는 디자인 패턴이 되었지만 사실 팅커벨이라는 디자인이 나올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엄폴의 생각이다.    


서른 세 살때였어요. 뒤를 돌아보니 계획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더군요. 계획대로 되는 것처럼 가다가 안 되고를 반복했더라구요. 앞으로의 삼십삼 년도 계획하지 말자고 마음먹었죠. 그런데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물 따라 꿈꾸던 일들은 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 꿈꾸며 살자, 꿈대로 살자고 다짐했죠. 팅커벨도 꿈꾸던 것이었지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태국과 인도, 인도네시아를 경유하는 한 달간의 여정을 준비하던 11월. 강남의 카페에서 거의 매일 만났다. 순댓국과 갈비탕을 나누며 우리는 헤어졌고, 인쇄소의 굉음을 들으며 우리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렇게 라떼아트와 커피, 그리고 그의 삶을 닮은 책 <라떼아트, 행복을 그리는 시간>은 그가 없는 동안 사람들 속으로 다가 왔다. 귀국한 다음날 일 년에 한번쯤 글이 올라 오는 그의 SNS에 사진과 메모가 올라왔다.      

마지막 원고를 넘기고 한 달가량 외국 일정을 하고 돌아와 책을 처음 받아봅니다. 대구로 내려가는 기차속에서 열어보기전 사진에 담았습니다. 책을통해 같은 길을 걸어가고 았는 바리스타들에게 조금이나마 응원과 위로를  전해주고 싶었었는데 SNS를 통해 책사진과 글을 올려주신 많은 분들의 이야기들이 저의 마음에 오히려 더 큰 응원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올겨울 따뜻한 선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엄폴은 기타를 두드리며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유일한 자작곡 <Different And Same>은 그의 노래 실력과는 별개로 사람을 뭉클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이 노래에 대한 사연과 가사는 책에 설명되어 있다)    


그가 좋아하는 에릭 클랩튼과 비 비 킹이 함께 부른 <Come Rain Or Come Shine>은 나보다 타인을 위해 귀 기울이고 위로하는 목소리 때문에 더 뭉클하다. 타인에게 작은 위로라고 되고 싶다는 엄폴의 바람처럼 말이다.     

Day may be cloudy or sunny,

어쩌면 흐릴지도 모르고, 맑을 지도 몰라

We're either in or we're out of the money.

어쩌면 우리 둘은 돈이 바닥날지도 모르지.

I'm with you always.

난 너와 언제나 함께야.

I'm with you rain or shine.

비가 오던 맑던 난 너와 언제나 함께야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인도네시아 만델링이 저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만델링은 예전에는 개성있는 커피, 흙냄새, 남성적이다, 거칠다는 느낌으로 여러 사람들이 좋아하던 커피였는데 지금은 그저 그런 보통의 커피로 다뤄지고 있죠. 만델링을 십 년 넘게 강배전으로 볶아 왔습니다. 라떼를 만들 때 많이 사용하기 때문인데요. 이 원두도 저도 오래 견디는 것을 잘하는 것 같아요. 2차크랙 끝까지 밀고 올라가서 향을 내주는 것이 이 커피뿐이거든요. 밝게 볶으면 원두가 가진 향이 잘 살아나지 않죠. 이렇게 볶고 저렇게 볶아도 심심해요. 이 커피는 그저 욕심 안내고 자기 포지션을 알고, 자기 할 일을 안다고 할까요. 스스로 우쭐대며 나서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친구가 화려하게 살아가면 뒤에서 응원하며 박수쳐줄 줄 알고, 그냥 나는 만델링이니까 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가는 거죠. 흙냄새를 내면서 많이 볶아 쌉싸름한 맛을 내주면 좋아하는 친구죠. 나도 오래도록 묵묵하게 인생에서 견디는 것을 잘하는구나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인도네시아 만델링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가장 닮은 커피를 말하라는 물음에 대한 답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많이 마셨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메뉴였지만 요즘은 쉽게 구경할 수는 없는 메뉴이기도 한 만델링. 그의 표현대로 쌉싸름한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곳도 느낄 수 있는 곳도 찾기 힘들지만 그 매력에 빠지면 쉽게 놓을 수 없는 맛.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신뢰가 가는 편안함을 주는 맛, 맞다. 만델링은 엄폴을 닮았다. 라떼아트를 하는 순간, 행복을 그리는 시간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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